춘천 커먼즈 포럼 1 <돌봄으로의 전환에서 돌봄을 위한 전환으로>
세션 1 – Commons, 모두에게 좋은 삶을 위한 이야기
돌봄을 통한 전환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생산양식으로서의 커먼즈 관점에서 보는 노동과 돌봄
한디디 (커먼즈네트워크/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대 아시아도시사회센터에 있는 한디디라고 합니다. 이전 발표가 너무 훌륭하고 감동적인데요. 사실 이런 자리가 될 줄 알았으면 좀 재밌는 사례들을 갖고 나왔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준비해 온 이야기는 좀 이론적이거든요. 커먼트 네트워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커먼즈가 뭐냐”, “그것이 진짜 커먼즈냐” 등등 커먼즈가 무엇인가에 대한 얘기를 계속 해오던 흐름이 있어요. 그 와중에 제가 몇 년 전에 “커먼즈는 생산 양식”이라는 얘기를 했다가 한 판 커먼즈의 불화가 만들어진 적이 있거든요, 생산 양식이라는 말을 사람들이 정의하는 방식이나 그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가 전혀 다르다 보니까 점점 이야기가 산으로 간 경험이 있어서. 그래서 이번 기회에 제가 커먼즈를 생산 양식으로 정의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얘기를 하고, 그걸 돌봄이랑 같이 정리를 해보고 싶었어요.
굉장히 개념적인 발표를 준비했다는 구질구질한 변명인데요. 앞에서 해주신 마음 훈훈한 발표 후에 이런 발표를 하게 돼서 죄송하지만, 방금 발표하신 선생님과 그 의료진들, 집을 고쳐주는 사람들, 이웃 복지를 해주시는 분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돌봄, 그러니까 상호 연결로서의 돌봄을 수행하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왜 이분들은 이렇게까지 타인을 돌보는 인간이 될 수 있었을까’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커먼즈적 고찰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호모 이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인가, 아니면 돌보는 사람들(호민 큐란스)인가?
돌봄 논의가 몇 년 사이에 엄청 증가를 했죠. 이 돌봄 논의를 끌어낸 건 사실 팬데믹이었습니다. 아까 커먼즈란 결국 서로 기대어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사람들은 좋건 싫건 간에 절대로 혼자 자립된 존재가 아니며 언제나 기댄 존재라는 것을 가장 폭력적으로 드러낸 사건이 바로 팬데믹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이미 너무나 얽혀 있는 존재인데, 이미 얽혀 있음을 잘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돌봄의 위기 같은 것이 드러난 것이죠. 또 돌봄이라는 게 항상 ‘여성이 하는 일’, ‘집안일’이라는 식의 취급을 받아왔지만, 사실은 가장 하찮은 일로 취급받던 돌봄이야말로 세상을 지탱하던 노동이었다는 것도 보여준 순간이었죠. 더이상은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는 삶을 지속할 수 없겠구나”라는 문제의식이 생기면서, 돌봄이라는 것이 어떤 전환의 핵심적인 키워드로 떠올랐다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돌봄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계속 진행이 됐는데요.
근데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라는 전환의 방법론이 문제가 될 텐데요. 제가 여기 인용한 트론토라는 분은 꽤 유명한 돌봄 학자세요. “돌봄을 통한 전환” 을 말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인용하시는 분인데, 이 조안 트론토라는 학자는 인간을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 ‘호모 이코노미쿠스’로 보는 게 아니라 돌보는 사람들 ‘호민 큐란스’로 봐야 한다는 제안을 하십니다. 근데 좀 낭만적으로 들리죠. 일테면 커먼즈의 비극을 얘기한 게릿 하딘이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기 때문에 커먼즈는 불가능하다라고 얘기한 것이 극단적으로 들리는 것만큼이나, 인간은 원래 돌보는 존재라고 얘기를 해도 잘 와닿지 않잖아요. ‘다 같이 착한 사람이 되자’는 식의 도덕 교육으로 될 일도 아니구요.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텐데, 여기서 실제로 ‘돌보는 사람들’ 즉, 호민 큐란스의 사례라고 볼 수 있을 만한 걸 하나 갖고 왔어요.
다른 사람의 고통을 꺼리는 호민 큐란스
저는 이 사례가 참 재밌었는데요. 어떤 이야기냐면, 미국 개척 시대에 백인하고 인디언들 간에 갈등 상황이 계속 벌어지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백인 아이들이 전쟁 중에 인디언들한테 납치되거나 혹은 길을 잃고 인디언 마을에 흘러들어간 경우가 꽤 있었다고 해요. 여기 보이는 ‘캡처드‘라는 책은 그런 아이들에 대한 기록인데, 재밌는 게 이 아이들 중에 나중에 구출되거나 여러 이유로 백인 사회로 돌아간 아이들이 상당히 있는데, 거의 대부분이 백인 사회에 적응을 못하고 탈출하고 인디언에게 되돌아갔다는 거예요. 그중에는 엄청난 재산을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재산을 다 자기 동생한테 줘버리고 돌아간다거나 한 경우도 있구요. 뭐, 어렸을 때 이미 인디언 사회에 적응했으니까 그런 게 아니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텐데요. 그게 아닌 게, 반대의 경우, 즉 인디언의 아이들이 백인 사회에 흘러들어온 경우에는 반대로 시간이 아무리 걸려도 백인 사회에 적응을 못하고 계속해서 탈출하거나 다시 돌아가려고 했다는 거죠.
이런 일들을 두고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알려진 벤자민 프랭클린이 자기 친구한테 “왜 백인도, 인디언도 문명을 혐오하고 탈출할까”라는 고민을 토로한 편지가 있다고 해요. 그럴 정도로 이런 사례가 많았다는 건데요. 학자들이 대충 설명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일단은 인디언 사회가 여러모로 훨씬 자유롭다. 성적으로도 자유롭고 이동의 자유도 크고, 노동 시간도 적고, 게다가 인디언 사회가 굉장히 외부인에 대한 포용력이 높아서 백인이 추장이 되는 사례들조차 많이 있었대요. 그리고 사회적인 유대가 강렬하고 (그러니까 이건 저도 되게 신기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동의 자유 들고남의 자유가 큰데 동시에 사회적인 유대가 강렬하고 상호 돌봄이 안정적이어서 사람들이 그때의 삶이 훨씬 더 행복하다고 느꼈다는 거죠.
제일 재미있었던 건 이런 상호 돌봄에는 인디언들이 다른 사람의 빈곤이나 고통을 꺼리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있는데요. 이게 뭐냐면 다른 사람들의, 옆에서 누가 빌빌거리고 고통스러워하면 자기가 싫다는 거예요. 그런 꼬라지를 보는 게 싫고 즐겁지 않기 때문에 그러니까 자기를 위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거죠. 저는 이 사례를 보면서 여기서 돌봄이라는 개념이 결국은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게 재밌었어요.
돌보는 사람들을 생산하는 배치로서의 커먼즈
현대사회의 각종 문제나 생태 위기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에코 페미니즘의 논의라든지 이런저런 논의를 보면 무감각에 대한 얘기들을 많이 하잖아요. 왜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지금 우리에게 들이닥치고 있는 현실들을 계속해서 밀어내고, 마치 나하곤 상관없는 것처럼 느낄가. 왜 옆에서 벌어지는 불행들도 나나 내 가족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나랑 상관없는 것처럼 여기게 되는 것일까. 그걸 발 플럼우드라는 페미니스트 학자는 ’원격성‘이라는 말로 표현을 하는데요, 이 원격성이라는 게 실제로 거리상의 문제가 아니라 연결성을 감지하지 않고, 내 문제가 아니면 우리 가족의 문제가 아니면 신경을 꺼버리는 일종의 마비의 메커니즘입니다.그러니까, 인디언 사회에는 이런 원격성과 굉장히 다른 메커니즘이 이쪽에는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트론토의 제안으로 되돌아가 본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은 본성적으로 경제적 인간이냐 혹은 돌보는 사람들이냐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배치에서 경제적 인간이 되거나 돌보는 사람들이 되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커먼즈가 이 질문에 대한 어떤 대답을 찾을 수 있는 개념적인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의 관계 속에서 돌봄을 다시 정의하기: 노동에 깃든 태도로서의 돌봄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커먼즈를 통해서 볼 때 돌봄과 노동의 관계를 잘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기 인용된 문장은 돌봄 논의에서 아주 많이 쓰이는 돌봄 정의인데요. 돌봄이 무슨 아이를 돌보거나 노인을 돌보는 것 같은 범주화된 활동이나 서비스가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유지하고 지속하고 복구하기 위해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활동이다’라는 것입니다. 이 정의는 돌봄을 근본적으로 관계적인 활동으로 정의하고, 근대 사회에서 굉장히 축소된 돌봄 개념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동시에 돌봄과 노동을 개념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기 위해서, 우리 세계를 유지하고 지속하고 복구하기 위해서 늘 하는 활동’을 우리는 노동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돌봄과 노동은 동의어일까요? 실제로 돌봄 논의를 할 때 제일 어려운 이유가, 돌봄이라는 단어가 타인에 대한 태도에서부터 어떤 인간 삶의 모든 활동, 혹은 우리 사회에서 특정하게 범주 지어진 노동까지 너무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거든요. 돌봄은 노동일까 혹은 노동이 아닐까? 만약에 어떤 특정한 종류의 노동만을 돌봄이라고 한다면, 과연 돌봄이 필요 없는 노동도 있는가라는 질문들을 할 수 있다는 거죠.
사전에서는 돌봄, 돌본다는 것을 ‘돌아본다’,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다’라는 의미로 정의합니다. 라틴어에서는 돌봄을 ‘큐라’라고 하는데 이거는 정말 관심 염려, 생각, 걱정, 근심, 슬픔, 주의, 경영, 관리, 작성, 치료, 양육, 보호. 거의 모든 필수적인 활동들로서의 ‘하다’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돌봄의 측면이 들어있다는 것이죠. 돌봄의 사전적 정의를 염두에 두고 생각할 때, 돌봄이라는 건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기도 하고, 지금 내가 했던 과정을 뒤를 돌아보는 것이기도 한데요. 이 돌아봄이라는 것은 내가 뭔가를 하고 있을 때 이 행위에 영향이 어떻게 미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거잖아요? 이 과정이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진 않지만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어떤 결과를 낼 것인가라는 걸 고려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돌봄과 노동의 관계를 이렇게 정리 하고 싶습니다.
아까 트론토 선생님이 하신 정의를 노동에 대한 정의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우리가 살기 위해 하는 모든 활동, 즉 노동은 근본적으로 관계적인 활동입니다. 이러한 노동은 마르크스가 정의했듯이 결국 인간과 자연 사이에 신진대사이기도 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신진대사기도 하죠. 신진대사로서의 노동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행하는 굉장히 관계적이고 구체적인 활동입니다. 그리고, 돌봄은 그런 관계적인 활동으로서의 노동에 깃들어 있는 태도입니다. 이렇게 정의할 때 우리는 돌봄과 노동을 구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노동, 즉 인간의 노동이 굉장히 추상화되고 상품화되는 임노동 관계 속에서 사람들이 돌봄에 대한 감각을 어떻게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보여줍니다. 즉, 돌봄의 전환이라는 건 결국 노동의 전환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죠.
서로 다른 사람들을 생산하는 생산양식으로서의 커먼즈와 자본주의
이런 정의 위에서 저는 커먼즈와 자본주의를 서로 다른 생산 양식으로 정의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이 생산 양식이라는 건 ‘상품을 생산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생산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인간 비인간 타자와 연결되는 노동을 통해서 물질적이고 정동적인 어떤 잉여들을 만들어내고, 그러한 잉여를 다시 다시 타자와 나누면서 살아가잖아요? 근데 노동의 조직을 통해 삶을 재생산하는 생산 양식이 어떻게 조직되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은 굉장히 다른 인간이 된다는 의미에서 저는 커먼즈와 자본주의를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관계를 생산하는 생산 양식’이라고 정의합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를 상품 생산 양식이라고 할 때, 그것은 자본주의가 상품을 생산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본주의가 생산하는 것은 상품관계, 즉 무언가를 소유하고 매매하고 교환하는 관계를 통해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관계를 생산하는 양식이라고 정의를 할 수 있다는 거죠.
여기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맑스와 엥겔스는 사실 생산 양식을 이런 방식으로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이 지점을 다시 봐야한다고 말하고요. 한 사회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는가는 항상 그 사람들의 주체성, 관계를 만드는 방식과 연결되어 있다는 거죠. 그렇게 볼 때 우리는 커먼즈가 왜 자본주의와 다른 생산양식인지 볼 수 있습니다.
커먼즈가 무엇인가, 라고 할 때 저는 네그리를 따라서 ‘너와 내가 무언가를 함께하는 활동’이라고 저는 정의합니다. 이 함께하는 활동 속에서 무언가 공통의 것이 만들어지죠. 이 공통의 것은 내 것도 네 것도 아니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함께 변화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근데 이런 함께 하는 활동,, 커머닝이라고 해도 좋은 신진대사의 활동이야말로 생명의 원리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안드레스 베버 같은 학자는 이렇게 얘기를 해요. 결국 신진대사로서의 노동인 커머닝은 생명이 생태계의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관계망이고, 이 속에서 만들어지는 커먼즈는 삶을 지속시키고 그러한 과정을 재활성화할 수 있게 하는 어떤 생태적이고 경제적인 시스템이라는 것입니다. 좀 더 설명하자면, 커먼즈에서 노동이라는 건 굉장히 구체적이고 맥락적인 활동들, 아이에게 젖을 주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작물 키우는데 퇴비를 주고 잡초를 뽑고 이런 굉장히 구체적인 관계적인 활동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신진대사의 노동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질적인 가치들을 생산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을 나눌 수 있는 일종의 인프라스트럭처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을 생산합니다. 이런 노동에서 목적은 삶을 지속하고 인간을 재생산하고 키워내는 것, 삶을 활성화하는 것으로서의 살림입니다.
반면 자본주의는 커먼즈를 인클로저 하면서 시작됩니다. 인클로저라는 건 상품화잖아요. 즉 자본주의는 인클로저와 상품화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인클로저가 땅처럼 어떤 물질적인 공유지들뿐만 아니라 인간의 노동력을 인클로저하고 상품화로 만드는 과정이었기도 했다는 점입니다. 즉,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자본주의는 커먼즈를 인클로저 하면서 시작되고 이 속에서 인간의 노동력은 상품으로 환원됩니다. 거기에서 우리들은 내 노동력을 하루에 8시간 1시간에 얼마를 갖고 팔게 되죠.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노동력은 구체적인 활동이 아니라 굉장히 추상적인 어떤 것이 되어버립니다. 또한 노동의 목적은 생산물은 화폐로 환원되는 교환 가치, 즉 이윤 생산이 되는 것이죠.
돌봄을 활성화하는 커먼즈의 산/살리는 노동
돌봄의 맥락에서 볼 때 중요한 건, 이런 서로 다른 노동의 과정이 돌보는 사람들을 생산하기도 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을 생산하기도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 인용된 문장을 발견했을 때 되게 재밌었는데요. 마르크스는 자본화되지 않은 노동, 즉 추상화되지 않은 구체적인 활동으로서의 노동을 ‘산노동’, living labour라고 부르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철은 녹슬고 나무는 썩는다. 산노동은 이러한 것들을 붙잡아 죽음의 잠에서 깨운다”고요. 즉 산노동은 무언가를 연결하면서 활성화되는 신진대사의 과정인거죠.
그런데 중요한 건 이게 늘 잘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철이 녹슬고 나무가 썩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우리의 노동 과정이 이것들을 활성화하는 과정이기 위해서는 이것들을 잘 알아야 됩니다. 내가 아닌 타자와 연결되기 위해서는 그 방식을 알아야 되는 거죠. 왜냐면 타자와의 연결은 여기 인용한 것처럼 “생명에 피할 수 없는 혼란, 갈등, 잘못된 타이밍, 부족함들을 항상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이고 연결되는 활동으로서의 노동을 잘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나와 타자 사이에 건강하게 관계가 맺어질지에 대해서 계속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죠. 이게 바로 ‘돌보는 감각’인데요, 이건 사실 우리가 이미 언제나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우리가 고양이 한 마리를 키워도 이 녀석이랑 내가 잘 지내려면 적응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 사이에서 얘가 나를 깨물거나 할퀴어서 상처가 나고 아프고 하다 보면 고양이도 자기 힘을 조절하는 과정들이 생기는 거잖아요.
이런 조율의 감각은 굉장히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만 생기는데, 산노동이란 일상 속에서 그런 구체적인 훈련을 계속 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근데 임금 노동으로서의 노동은 우리를 노동의 과정에서 소외시키고 그 결과물로부터 차단합니다. 어떻게 하면 잘 연결될지, 내 행동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는 과정에 사람들이 놓이게 되는 것이죠.
무관심한 개인을 생산하는 자본주의의 추상화된 노동
자본주의는 커먼즈 인클로저와 함께 시작하는데 이 속에서는 땅과 같은 공유지뿐만 아니라 인간의 노동력도 일종의 소유물이 됩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은, 이 근대적인 소유, 우리가 사적 소유라고 부르는 근대적인 소유가 그 정의상 타자의 접근을 끊어내는 것, 그러니까 인클로저, 울타리 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사회에 개인적인 소유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대적 사적 소유는 다른 사회들에 존재했던 개인적 소유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게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여러 사회에서 개인적인 소유는 그 소유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기도 했고, 누군가에게 처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소유의 자체가 사회마다 달랐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누가 무엇을 어떤 식으로 소유할지가 공동체 안에서 관계적으로 결정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땅은 개인적으로는 못가져, 집은 가질 수 있어 못 가져 이런 것들이 누군가의 기본권 같은 게 아니었다는 거예요.
소유자가 팔고 사고 처분할 수 있고 그것을 아무도 참견할 수 없는 어떤 전적인 권리로서의 사적 소유가 처음 등장한 것은 로마 후기에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등장을 했다고 해요. 그게 중세 사회에 사라졌다가 근대가 시작할 때 다시 등장합니다. 이 노예제라는 것은 사적 소유의 근본적인 성격을 드러내죠. 사람들, 혹은 무언가를 처분하고 교환 가능한 대상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을 그들이 속해 있던 상호 약속과 공통의 역사 집단 책임의 망에서 송두리째 뽑아내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이런 뿌리 뽑음의 과정을 이중으로 수행했습니다. 하나는 땅과 숲, 강과 바다 같은 어떤 우리들이 거기에 속해 있고 또 그것을 통해서 활성화되던 생태적 관계망에서 이것들을 뽑아내서 텅 비고 무력한 것으로서의 자연으로 만드는 과정이었고, 또 하나는 인간들을 이 관계망으로부터 뜯어내서 자기가 자기의 노동력을 팔아서 살아가는 독립된 개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만드는 과정이었습니다. 맑스는 이런 독립성은 환상에 불과하고 차라리 무관심한 개인들이라고 부르는 게 낫다고 말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신진대사를 끊어내서는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언제나 관계망 안에 속해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그 근원적인 상호의존성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관계망을 망각하고, 자신을 개인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을 만드는 과정이었다는 것이죠.
커먼즈를 다시 짓는 노동에 연루됨으로써 돌보는 인간-되기
커먼즈 논의에서 자원을 주로 많이 얘기를 하지만 사실은 인간이 어떻게 그 관계망으로부터 뽑아져서 상품이 되었는가가 굉장히 중요하고 핵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내부에서부터 뭔가를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노동을 바꾸는 것에서부터만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제는 사실 당장 임노동을 다 그만두고 살 수는 없다는거죠.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근데 여기 커먼즈 필드에 선생님들이 이렇게 많이 오셔서 참가하시는 것 자체가 우리가 임노동 관계로 환원되지 않은 어떤 영역을 늘리고 있는 활동들을 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결국은 일상생활에서 화폐 관계로 결코 환원되지 않는 관계를 늘려가는 것이, 우리가 우리를 돌보는 사람들로 만드는 관계를 조금씩이라도 복구하는 출발점인 것입니다. 그 속에서 어떤 공통의 감각이 만들어질 거구요. 물론 그게 자조적인 공동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새로운 소유나 나눔의 방식 같은 걸 창안하고 동시에 지금 국가가 장악하고 있는 여러 가지 복지 영역에서 우리가 개입할 여지를 늘려가는 것으로 연결이 돼야 될 텐데요. 그러한 저항, 그리고 서로를 돌보면서 저항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라는 건 결국 먹고 살기 위해서 할 수 없이 하는 노동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관계를 밑바닥에서부터 재조직하는 커먼즈들을 만들어내는 활동들을 통해서만 가능한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정말 중요한 것 또 하나는 커먼즈의 실험들, 현장들을 보면요. 그런 실험들이 돌봄을 위한 것이 아니더라도, 결국은 다 돌봄의 문제에 주목하고 문제시하기 시작을 해요. 그러니까 커먼즈에서는 돌봄이 자연스럽게 중대한 문제계로 떠오르는 거죠. (자본주의가 돌봄을 하찮게 여겼던 것과는 정 반대의 현상입니다.) 구체적인 활동, 관계적인 활동으로서의 ‘커먼즈 짓기’라는 산노동 속에서, 서로의 필요와 어떤 욕망과 이런 것들을 가늠하고 조율하는 능력들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결국 돌봄이라는 건 ‘나와 함께하는 타자의 필요를 감지하고 거기에 응답하는 능력’일텐데 이건 굉장히 구체적인 활동들, 즉 커먼즈의 산노동 속에서만 만들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글 | 한디디
발행인 | 박배균
편집장 | 이승원
편집 위원 | 김세환, 문지석, 송민석, 심여은, 윤수진, 윤형준, 한승지
발행처 | 서울대학교 아시아도시사회센터, 시ᆞ시ᆞ한 연구소
발행일 | 2025년 1월 31일
*2021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음(NRF-2021S1A5C2A03088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