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적 도시화와 그 대안들와 헤테로토피아로서 도시 커먼즈

1월 2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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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사유화, 상품화되는 신자유주의적 도시공간에서 도시를 커먼즈로서 상상하고 실천하는 시도가 있다. 이들 도시 커먼즈는 기존 공간 질서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질적 공간, 즉 ‘헤테로토피아’로 해석될 수 있다. 8월 공유&How에서는 국내외 사례를 중심으로 투기적 도시화의 문제점과 헤테로토피아로서 도시 커먼즈의 가능성을 조명한다.

1. 투기적 도시화

압축적 고도성장 속에서 한국의 도시 공간은 자본과 토건세력, 권위주의 정부의 개발연합에 의해 끊임없이 사유화되었고, 상품화되었다. 바로 한국의 도시가 거쳐온 ‘투기적 도시화’의 길이다. 이러한 투기적 도시에서 집은 사는 곳이 아닌 시세차익을 노리고 ‘사는 ‘것’에 가깝다.  공간에 대한 권리는 단지 ‘구매력’으로 얻은 사적 소유의 권리로 제한된다. 그리하여 높은 지대를 감당할 수 없는 도시의 빈민, 그리고 공간을 다채롭게 만들어온 기존의 주민, 상인, 예술가들은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축출된다. 

이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투기적 도시화의 문제는 글로벌 스케일에서도 나타난다. 높은 이윤을 향해 이동하는 글로벌 자본의 흐름은 더욱더 복잡한 투기적 도시화의 지형을 생산한다. 동아프리카 국가들의 도시화는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동아프리카의 투기적 도시화에 관한 Goodfellow의 연구에 따르면, 르완다, 에티오피아 등 전 세계에서 도시화율이 가장 낮은 국가들이 최근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도시화를 경험하고 있다. 이처럼 급격한 도시화를 이끄는 주요한 추동력 중 하나는 바로 글로벌 자본이다. 부동산과 관련된 엄격한 세금 및 규제가 부재한 제도적 환경과 높은 인플레이션율을 특징으로 하는 경제적 환 경은 이들 국가에 투자하는 글로벌 자본이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게 하였다. 그 결과 아디스아바바, 키갈리 등의 도시에는 높은 고층 빌딩과 고급 주택단지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사진설명르완다 수도 키갈리의 고층 빌딩 및 건축 현장, 사진출처 pixabay

하지만 이러한 도시에서 글로벌 자본이 생산한 공간을 점유할 수 있는 인구는 전체 도시민의 약 20%에 불과하다. 동아프리카 인구의 대부분은 새롭게 지어진 고층 빌딩과 고급 주거지를 구입 및 임차하기 위한 비용을 지불할 수 없다. 이에 따라 도시에는 아무도 점유하지 않은 빈 껍데기와 같은 공간만이 가득하게 되었고, Goodfellow는 이를 해골 도시(skeleton cityscapes)에 비유하였다. 더불어 부동산 개발의 과정에서 부동산 거품이 형성되었으며, 도시 전반을 점유하였던 기존의 슬럼들은 새로운 공간에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밀려나야만 했다. 즉, 글로벌 자본이 이윤을 얻기 위해 생산한 빈 공간들이 동아프리카 도시민들의 삶의 공간을 파괴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뼈대만 남은 공간들은 도시민이 그곳에서 어떠한 사용 가치도 향유하지 못하는 반면, 지구 반대편의 투자자들은 교환가치에 기초하여 이윤을 창출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산업화를 동반하는 전통적인 도시화의 풍경과는 달리, 동아프리카 국가들과 같이 상대적으로 도시화가 늦게 시작된 국가들은 투기적 자본의 힘이 도시화와 도시 경제의 성장을 이끈다. 이는 투기적 도시화가 비단 공간 불평등을 심화할 뿐만 아니라, 생산 부문으로의 자본 유입을 저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아프리카 도시민들은 생산 부문 및 경제 발전, 그리고 이에 따른 생활 수준의 향상이 부재한 상태에서 자신들이 향유하지 못할 장소에 삶의 터전을 내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투기적 도시화는 한 국가 내에서의 불균등 발전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글로벌 스케일에서의 양극화를 심화하는 역할을 한다.

사진설명Ndegeya, C., Rwandan Slum Dwellers Forced out for High-rise Project, The EastAfrican, 2018

2. 투기적 도시의 헤테로토피아들

Michel Foucault는 우리에게 이질성과 이소성의 감각을 가져다주는 반공간(contre-spaces)이자,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에 맞서는 장소로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의 개념을 제시한다. ‘헤테로토피아는 다른 모든 공간들에 대한 이의 제기’라는 그의 비유에서 헤테로토피아가 기존의 공간들과 이질적인 새로운 공간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Henry Lefebvre는 자본주의 및 국가가 생산하고 합리화하는 공간 질서, 즉 이소토피(isotopy)에 이질적으로 존재하며 균열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으로서 헤테로토피아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헤테로토피아는 기존의 공간 질서와 우리의 일상생활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영역이자 운동이며, 전통적인 도시의 중심성을 파괴하고 새로운 중심성을 창조할 가능성을 담지한다.

Torre David

이러한 맥락에서 베네수엘라의 토레 다비드(Torre David)는 투기적 도시화의 과정에서 발생한 하나의 헤테로토피아로 해석될 수 있다. 토레 다비드는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 위치한 45층의 오피스 건물이다. 1993년 완공을 앞두고 사업시행자인 David Brillembourg가 사망하며 공사가 중단되었으며, 1994년 베네수엘라 경제 위기로 건설 자금을 제공하던 금융회사들이 파산하면서 완전히 버려지게 되었다. 이 버려진 건물을 찾은 것은 다름 아닌 경제 불황으로 일자리와 주거지를 잃은 도시 빈민들이었다. 이들은 경제 위기 이후 도시 외곽에서 비공식 주거지를 형성해 살고 있었지만, 2007년 거대한 홍수로 인해 주거지가 파괴되면서 방치된 토레 다비드를 찾았다. 약 750여 가구가 미완의 상태로 남겨진 토레 다비드를 점유함에 따라, 토레 다비드는 세계 최고층의 ‘수직형 슬럼(vertical slum)’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토레 다비드의 주민들은 건물의 안전성을 강화하고, 삶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건물을 점차 변형시켜 나갔다. 또한 거주권 확보를 위해 주민 공동체를 결성하고, 2009년에는 점거 2년 만에 ‘Cooperativa de Vivienda Caciques de Venezuela’라는 조합을 설립하였다. 전기조차 공급되지 않았던 토레 다비드는 점차 하나의 마을로써 그 모습을 갖추게 된다. 식료품점, 잡화점, 교회, 농구장 등의 시설이 들어섰으며, 주민들은 공용 공간을 함께 관리하고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자율적 규칙들을 수립해나갔다. 많은 건축들과 학자들은 주거지이자 공동체로서 토레 다비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으며, 그곳에서부터 비공식 주거지의 혁신과 실험의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2014년 베네수엘라 정부는 토레 다비드를 상업용 건물로 개발하기 위해 중국 투자자들과 계약을 체결하였으며, 약 1,200 가구들을 퇴거시켰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주민들을 사회주택에 수용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지만, 이는 헤테로토피아로서 토레 다비드의 의미와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조치라 할 수 있다.

Art Squat

토레 다비드가 시민들의 우연적 개입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헤테로토피아라면, 유럽의 ‘아트 스쾃’은 투기적 도시를 예술적으로 전유하려는 보다 의식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스쾃’(squat)은 오스트리아 목동들이 자신의 초지가 아닌 곳으로 양 떼를 몰고 가는 행위에서 탄생한 말이다. 산업혁명 이후 주거공간의 부족으로 고통받던 노동자들은 비와 추위를 막아줄 수 있을 만한 빈 공간이 발견되면, 그곳에 흘러들어가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스쾃은 “어떠한 허가도 권리도 없는 점유”라는 사회적 의미를 띤 단어로 쓰이게 된다. 삶의 절박한 요구로부터 시작된 ‘스쾃’이라는 행위는 68혁명 이후 문화적, 사상적인 의미를 담지한 실천으로 발전한다. 70년대에 이르러 반정부, 반문화주의와 함께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몇몇 예술가, 사상가들은 그들의 작업과 전시를 전개할 공간을 물색하며 스쾃이라는 방법론을 선택하게 되었고, 이들은 ‘아트 스쾃’이라는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보수적인 예술 정책과 다소 느슨한 정부의 대응 덕분에 많은 아트 스쾃이 탄생하게 되었다. 아트 스쾃들은 이렇게 방치된 빈 공간을 점유하고, 도시를 장악하고 있는 공고한 ‘사적 소유권’의 신화에 맞선다. 

‘리볼리(Rivoli) 가’는 파리의 대표적인 상업가로 중 하나이다. 이 길 한복판에는, 파사드에 젖가슴 모양의 이상한 구조물을 달고 있는 이질적인 건물이 있다. 바로 아트 스쾃으로 시작해, 이제는 유명한 파리의 문화예술공간이 된 ‘59 Rivoli’이다. 정확하게는, 59 Rivoli는 예술가 집단이 창작 및 전시 활동을 하고 있는 ‘로베르네 집-자유로운 전자(Chez Robert – Electron Libre)’가 위치한 건물의 주소이다. 원래 이 건물은 프랑스 은행인 크레디 리오네(Crédit Lyonais)의 소유였으나, 은행이 파산하면서 정부로 소유권이 넘어가게 되었고, 그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그러나 세 명의 예술가들이 14년간 방치돼 있던 곳을 1999년 11월 1일, 불법 점거함으로써 빈 건물은 새로운 문화적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예술가들이 이 건물을 점거하자 건물주는 예술가들을 상대로 소송을 냈고, 점거한지 5개월이 채 안 돼 법원으로부터 강제철거 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예술가들은 변호사의 도움으로 철거를 6개월 뒤로 미루고 그동안 언론과 사회단체에 도움을 구했다. 이어 시민들이 철거 반대의 목소리에 힘을 실으면서, 2003년 파리시는 건물주로부터 건물을 매입해 매우 싼 가격에 이들에게 임대했다. 그렇게 2009년 새롭게 단장된 모습으로 59 Rivoli는 ‘aftersquat’이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그 문을 열게 된 것이다. Rivoli의 현재 이곳에서 열리는 예술 행사들은 방문객들에게 모두 개방되며, 이들은 개방된 시간에 건물을 드나들며 예술가들의 작업 현장을 직접 지켜보며 그들과 작품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한편  ‘La Generale’은 비교적 현재 진행형인 아트 스쾃이다. 59 Rivoli의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예술가들을 위한 작업 공간 확보를 위해 버려진 교육부 건물의 일부를 점거했다. 라 제네랄은 기본적으로 예술가들의 레지던시이다. 그래픽 디자이너, 건축가, 요리사, 학자, 배우, 장식가, 감독, 수목 재배자, 양봉가, 사진가, 감독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약 15명의 활동가와 2명의 직원으로 구성된 컬렉티브라고도 할 수 있겠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들이 ‘정치 생태학적 실험실’로서 스스로를 묘사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들은 2019년 12월까지 부분적 불법 점유 상태였던 건물 옥상에서 채소를 재배하기도 하고, 발효하고, 다양한 먹거리를 실험하며 요리를 하기도 한다. 이러한 실험을 통해 음식이 경작되고 재배되고, 소비, 유통, 가공되는 매우 일상적인 과정에 내재하는 정치적, 생태학적 화두에 대해 고민한다. 또한 La Generale이 분투하는 것은 투기적 도시뿐 아니라 그들 공동체 내부의 문제다. 어느 누구도 독재하지 않고, 개방적이고 수평적인 소통을 통한 의사 결정을 위해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는 데 매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한다. 때로는 갈등도 불사한다. 공간과 그것을 둘러싼 공동체 내부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커먼즈’적인 고민은  무엇보다 본격적인 ‘정치 생태적’인 실험은 ‘공동의 공간’을 관리하고 운영해나가기 위한 그들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설명La Generale의 정원, 사진 출처 Giovanni Del Brenna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흐름과 함께 최근 많은 아트 스쾃들은 제도의 테두리 내로 진입하기도 했다. 건물주와 이용 대차 계약을 맺거나, 관광지화되며 상업적 도시의 스펙터클로 포섭되기도 하며, 혹은 제3의 방향성을 가진 공간으로 발전하기도 한다(대표적인 예로 폐 병원 부지에 예술인 레지던시와 난민 리셉션을 기획한 les grands voisions 프로젝트).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아트 스쾃들이 국지적으로 발생과 소멸을 반복하고 있으며, 이는 영리한 자본이 지속해서 매끈하게 만들어가는 도시에 균열을 내는 헤테로토피아적 실천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기존에 예술이 소통되고 향유되는 방식에 있어서의 부르주아적인 허구성을 비판하면서, 이주자, 부랑자 등과 같이 사회와 예술로부터 소외된 계층들과 함께 ‘감각적인 것을 나누는’ 시도를 실천해가고 있다.

3. 헤테로 토피아와 커먼즈 

도시 커먼즈 운동은 자본축적의 논리에 기초하여 형성된 기존 도시의 배열을 바꾸어 커먼즈로서의 도시(city as a commons)를 만드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도시 속 헤테로토피아를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자본주의적 관계의 (재) 생산에 필요한 조건을 유지하기 위한 자본의 움직임, 그리고 사적 소유권의 논리에 지배된 종래의 도시 공간에 대하여 도시 커먼즈 운동은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또한 전통적인 공간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의제, 권리 담론, 그리고 이들이 출현하는 거점들의 연결을 통해 이질적인 장소를 창조하고, 이는 다시 새로운 실천과 결합된다.  토레 다비드와 스쾃 아틀리에의 사례는 도시 커먼즈 운동이 투기적 도시화에 대항하는 헤테로토피아를 형성하며, 이로써 신자유주의적 공간 질서에 사로잡힌 도시를 해방적 공간으로 전유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더 나아가 이와 같은 역동적인 변화의 가능성은 투기적 도시의 내부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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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fellow, Tom. Urban fortunes and skeleton cityscapes: real estate and late urbanization in Kigali and Addis Ababa. International Journal of Urban and Regional Research, 41(5), 2017, pp. 786-803.

Gómez, Manuel A. The Tower of David: Social order in a vertical community. FIU L. Rev., 10, 2014. pp. 214-238.

Ndegeya, C., Rwandan Slum Dwellers Forced out for High-rise Project, The EastAfrican, 2018, URL: https://www.theeastafrican.co.ke/tea/rwanda-today/news/rwandan-slum-dwellers-forced-out-for-high-rise-project–1384688.

Santos Junior. Orlando Alves dos. “Urban common space, heterotopia and the right to the city: reflections on the ideas of Henri Lefebvre and David Harvey.” urbe. Revista Brasileira de Gestão Urbana, 6, 2014, pp. 146-157.

Torre David. INTERLAB. 2008. URL: http://interlab.kr/archives/4571   


발행인 | 박배균

편집장 | 이승원

편집 위원 | 최희진, 송지우, 상덕, 홍지수, 홍다솜, 이혜원

발행처 | 서울대학교 아시아도시사회센터, 시ᆞ시ᆞ한 연구소

발행일 | 2021년 8월 30일

*2017년도 정부재원(교육부)으로 한국연구재단 한국사회과학연구사업(SSK)의 지원을 받음(NRF-2017S1A3A2066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