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커먼즈 포럼 2 <커먼즈는 국가에 대항하는가 – 재정과 금융을 커먼즈로 보기>
커머너의 관점에서 다시 보는 여성 예산 운동과
성인지 예산 제도화의 문제
김은희 (에코페미니즘연구센터 달과나무 소장)
반갑습니다. 김은희라고 합니다. 주어진 시간 안에 짧게 해보려고 하는데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전제로 깔려 있는 이야기들이 겹겹이 있어서 좀 조심스럽기도 한데요, 앞선 발표에서 김상철 선생님께서 시민은 중립적인 존재로 두고 제도의 변화를 통해서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냐를 질문했다면, 저는 ‘제도화를 해봤는데 무엇이 달라졌나?’ 하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개별적) 제도화보다 ‘우리는 국가를 믿는가?’ 또는 ‘국가를 얼마나 믿고 있나?’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은 어떤가?’ 이런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성인지예산제를 아십니까?
제 발표는 커머너의 관점에서 다시 보는 여성예산운동과 성인지예산제의 문제인데요. 성인지예산제 자체에 대해서 얘기를 한다기보다, 그 경험을 통해서 지금 무엇을 반추할 수 있는가 라는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혹시 성인지 예산(gender budgeting) 처음 들어보시는 분 계신가요? 대부분 성인지 예산을 잘 모르실 겁니다. 조세를 통해 확보된 국가와 지방정부 재정에서 여성들의 삶이 배제되지 않도록 적절한 규모의 예산을 확보하고, 재정이 성평등 목표에 따라 배분되고 집행될 수 있도록 젠더관점에서 예산과정에 개입하는 것을 말합니다. 법으로 제도화된지 제법 됐지만 성인지(成人誌)와 성인지(性認知)를 구분하지 못하는 정치인들도 여전히 있습니다. 우스갯 소리가 아니라 국정감사장에서 의원들이 피감기관에 성인지 예산을 제대로 했냐 물어보면 “우리 기관에는 그런 좋지 않은 황색지 같은거 없다.” 이렇게 답변했던 사례도 있었습니다.
예산의 민주성과 형평성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성인지예산제가 도입 되었고 제도화가 되었다는 성과는 있는데, 성인지예산제를 도입해서 실제 예산이 바뀐 게 무엇이냐라고 하면 거의 찾기가 어렵습니다. 계속 들여다보는 사람도 발견하기 어려워요. 이게 ‘제도화’의 성공 사례라고 얘기는 해도, 사람들에게 소개할 만한 사례를 찾아보면 없더라고요. 그런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상황이 왜 이렇게 됐을까를 질문하게 되는 겁니다. 제도화라는 방식을 통해 국가 재정이 커먼즈가 될 수 있다면 과연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커머닝을 하는데, 문턱이 있던 없던, 공동체가 국가만큼 크던 작던, 커머닝이 되면 성평등은 저절로 따라오는가 하는 질문까지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여성예산운동에서 성인지예산제로, 제도의 필요와 울퉁불퉁한 제도화
성인지예산제라는 제도는 한국만 있는 건 아닙니다. 본격적인 제도화는 90년대 중반 이후 북경에서 제4차 세계여성회의가 있고나서 ‘성주류화’라고 하는 게 전략으로 채택되면서 그 전략을 구체화하기 위한 정책 도구로서 성별 영향 평가, 성인지 교육 이런 것들과 함께 만들어졌습니다. 한국에서도 당시에 많은 여성 활동가들과 정부가 함께 북경여성회의에 참여했고, 이 경험은 이후 20여년간 여성운동과 성인지 정책/젠더 정책/성평등 목표 이런 것들에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내에서 여성예산운동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입니다. 시민의 절반이 여성들인데 국가 재정이 과연 여성들의 삶을 위해 쓰이고 있는가, 평등하게 배분되는가를 질문하고 실제 그것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예산 안에 여성에게 특정된 예산은 얼마나 있는지, 중립적으로 편성된 예산이 여성과 남성에게 어떻게 다른 효과를 미치는지 이런 걸 따져보는 거죠. 분석을 시작해보니 여성을 위한 예산이 일단 거의 없더라고요. 그래서 초기에는 여성예산운동이라고 하는 이름이 더 와닿았던 것 같습니다. 국가 재정 안에서 여성을 위한 예산을 확보하는 것, 그리고 이걸 제도화해야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고 안정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라는 믿음 같은 게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인지예산제를 어떻게 시행하는가 하는 방식은 나라마다 다양합니다. 한국처럼 법에 규정해서 공무원들이 성인지 예.결산서를 작성하게 하는 경우가 있고, 스웨덴처럼 정부가 한 해 사업계획을 수립해서 의회에 보고하는 과정에서 성별에 따라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같이 살피도록 예산 프로세스에 녹여내는 방식도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법제화라는 측면으로 평가해보면 제도화 수준이 되게 높습니다. 왜냐하면 법으로 강제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걸 중요한 성과라고 말해왔습니다. 국가재정법에 보면 예산의 원칙 중 하나로 성인지예산제를 천명하고 있고, 이를 위해 성인지 예산서도 작성하고 있고, 예산뿐만 아니라 결산까지 해야하고, 중앙정부 뿐만 아니라 지방정부도 의무적으로 하게 된지 이미 10년 넘었습니다. 이제는 지방정부만이 아니라 교육청에서도 성인지 예산제에 관한 별도 조례를 만들어 운영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은 관심이 없고, 잘 모르죠. 그러다가 갑자기 주목받은게 2022년 대선이었습니다. 윤석열 후보가 여성가족부 폐지 딱 7글자 적고, 그 다음 성인지 예산을 없애야 한다는 움직임이 만들어졌죠. 반페미니즘 세력의 타깃이 된 거에요. 여성가족부 예산하고 성인지예산도 구분을 못하면서, 성인지예산제라고 하는 게 시민을 위한 게 아니라 페미들이 쓰는 돈이고, 여자들이 아이도 낳지 않게 만드는 데에 쓰인다는 식으로 호도 했습니다. 여성가족부 없애자와 성인지예산 없애자 두가지 공격을 한꺼번에 받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당시에 여성가족부 차관이 기자회견을 열고 적극적으로 해명을 합니다. 여성가족부 예산은 정부 전체예산의 0.2%이며, 성인지예산은 여성을 위한 예산이 아니라 성인지적 관점에서 분석 대상이 되는 주요사업의 예산의 규모일 뿐이라고 얘기합니다.
저 같은 사람이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여성부차관의 해명이 틀린 말은 아닌데 마음이 착잡한거죠. 여성예산운동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건 실패한 거예요. 기술관료적으로 제도 안에서 관료제가 말하는 성인지예산이 굴러가고 있을 뿐이죠. 분석 대상일뿐, 그걸로 끝이에요. 그리고 이런 요인들 외에 여성예산운동에서 출발한 성인지예산제의 정치성 자체가 탈각되면서 젠더 이슈에 한정된 문제로 공동의 문제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구들이 누구와 함께, 어디에 서서 어디를 향해
그럼 제도화는 이뤘는데 도대체 성인지예산이라고 하는 것은 왜 이렇게 끝나는가. 성평등을 목표로 향해 가는 성주류화의 어떤 단계에 있는가 또는 사회를 더 많이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보면 한국은 딱 이정도 만큼만 제도화된 거예요. 불평등한지 아닌지 알아보는 ‘인지성’ 역량 정도. 하지만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응답해야 되고 실제로 바꿔야 되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제도화 되고 나면 누가 하게 되나요? 국가가 하는 거죠. 이건 우리가 (기존 방식이) 국가를 향해, 그 역할을 기대하기 때문에 또는 그것까지는 내가 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에게 맡겨두는 부분이 크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성인지예산제만이 아니라 공공재정(public finance) 자체가 국가의 몫이 되는거죠.
초기 성인지예산에 관한 다른 나라의 사례의 경우, 예를 들어 성인지예산 분석을 통해서 국방 예산이 너무 많다고 분석 진단이 나오면 그 예산을 줄여서 복지에 쓰게 하거나 하는 방식이 있었는데, 우리 프로세스에는 그런 예산의 구조 변화는 없는 거죠. 그리고 일찍이 여성예산운동을 시작한 영국 같은 경우 제도로서 성인지예산제는 없지만, 여성예산그룹(WBG, Women Budget Group) 같은 운동 그룹이 있고, 정부가 예산안을 발표했을 때 그것에 대해서 계속 모니터링하고, 토론하고, 의견을 내고, 문제 제기하는 방식의 활동을 매우 체계적으로 하고 있는 거죠. 그 과정에서 성인지 관점이라고 하는 것을 훈련하기 위한 프로세스나 툴킷 같은 게 다 들어있지만, 그것이 제도화 요구로만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이 외부에서 이를 계속해서 실행하고자 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후위기와 관련해서도 영국 여성환경네트워크(WEN)와 WBG가 콜라보 해서 지역에 있는 활동가들과 토론을 통해서 대안적인 사회의 모습을 상상하는 활동을 포함한 페미니스트 그린 뉴딜 프로젝트를 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기후위기 대응 예산에 어떤 부분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성인지 관점에서의 분석을 통해서 여성에 대한 것만 확보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전체를 바꾸는 방식이라고 이해할 수 있거든요.
우리가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게 뭐냐면 ‘누구가, 어디에 서서, 어디를 향하는가’인거 같아요. 이를테면 우리는 정부에게 ‘제도를 만들어라’, ‘예산을 확보하라’까지 하고, 정부는 그걸 빠르게 수용해서 법제화했지만 모두를 위한 방식으로 작동되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민들은 제도의 외부에서 끼어들 여지가 없는 이런 상태인거죠. 公과 共 사이, 이 차이가 저는 되게 크다고 생각합니다.
모두를 위한 커머닝이라는 감각
제가 발표한 주제는 성인지예산제라는 하나의 사례지만, 이 문제의식은 87년 이후 또는 97년 이후 운동들이 지금에 와서는 의제별로 전문가그룹이 되어서 제도화를 촉구하고 국가와 협상 하지만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은 많이 부족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일테면 성인지예산제가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단 말이에요. 국가가 제도를 후퇴시키는, 시행령 같은 걸 개정하고 있는 상황을 시민들은 아무도 모르죠. 관심도 없죠. 그게 성인지예산만 그럴까? 서울시 사회서비스원 같은 거 보세요. 공공성과 돌봄 중심 전환에 대해 얘기하지만 시민들은 사회서비스원 없어지는 거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게 뭐지?라고 하는 생각으로 되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기술관료적인 제도화와 그 과정에서 멀어진 시민과의 거리, 절차적인 측면의 ‘시민참여’보다 저항과 탈환 그리고 함께라는 감각이 희미해지는 이런 것들이 문제였다고 생각을 하고, 이걸 풀어가는 게 중요한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느 대목에서든 그때그때 여성들의 이해를 관철하는 것만이 아니라 여성들이 어떻게 배제되지 않고 개입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모두를 위한 평등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커먼즈 같은 경우에도, 커먼즈와 성평등의 관계라고 하는 게 언제나 자명하진 않기 때문에, 예를들어 바르셀로나앤꼬뮤 같은 데서 만들어진 매뉴얼을 보면, 도시를 급진화하는 커머닝에서 ‘정치를 여성화하기(feminizing politics)’에 주목하면서 자치주의 원리에 젠더분석을 포함하고 그 안의 개별적인 프로세스에도 이런 방식이 관철되도록 계속 싸워야 한다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여전히 국가에게 요구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관하여, ‘제도화’ 운동의 한계로 다 설명되지는 않겠지요. 기본적으로 국가 재정의 원리라고 하는 것과 사람이 살아가는 살림살이의 원리가 달라졌습니다. 법제도가 명시한 국가 재정의 목표는 효율성, 성과지향성에 방점을 찍고 있고, 호모이코노미쿠스가 된 개인에게 국가 재정은 덜 내고 더 받는 자원/예산 확보 경쟁이고 보면, 내가 기여하고 손해도 볼 수 있지만 모두를 위한 커먼즈적인 감각이 가능한가라고 하는 질문도 생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마무리를 하자면, 라인보우 책에서 ‘라이벌’의 유래, 어원 같은 것을 얘기하잖아요. 원래는 한 우물을 같이 쓰는 사람, 이웃이라는 뜻이었지만 지금은 어떤 하나를 놓고 경쟁, 분투하는 경쟁 관계를 라이벌로 이해합니다. 예산이나 재정이라고 하는 것도 그게 공통의 우물이지만 우리의 관계가 함께 나눠쓰는 이웃이냐 아니면 예산은 먼저 따먹는 사람이 임자인 경쟁 관계냐 라는 관점에서 과연 커먼즈가 될 수가 있을까 이게 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감사합니다.
글 | 김은희
발행인 | 박배균
편집장 | 이승원
편집 위원 | 문지석, 송민석, 심여은, 윤수진, 한승지
발행처 | 서울대학교 아시아도시사회센터, 시ᆞ시ᆞ한 연구소
발행일 | 2025년 5월 31일
*2021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음(NRF-2021S1A5C2A03088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