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커먼즈 포럼 3 <국가를 커머닝하기>
발표자 | 윤여일(경상국립대학교 사회학과 조교수), 박정환(춘천사회혁신센터 센터장), 김현주(A.C. 클리나멘, ㅃㅃ 보관소),
엄문희(아름다운 붉은 선), 이채원(공유성북 원탁회의 사무국장, 협동조합 고개앤마을 사무국장)
지정토론 | 박배균(서울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
사회자 | 정기황(문화도시연구소 소장)
지정토론
박배균입니다. 토론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토론을 준비하면서도 느꼈지만, 아까 발표를 들으면서 이 세션의 토론을 맡은 것을 엄청 후회를 했습니다. 언젠지 모르겠지만 이승원 선생이 저한테 카톡을 보내서 이 세션의 토론을 맡아달라 해서 아무 생각 없이 예, 그랬는데 그 순간에 포기할 걸 그랬습니다. 오늘 발표들은 내용도 훌륭하지만, 너무나 감동적이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들이 많았고, 생생한 현장 이야기가 많다 보니까 엄청나게 큰 감정과 정동의 요소들로 발표들이 구성되어 있는데 제가 그런 감동과 울림이 있는 내용에 대한 토론을 잘 못하거든요. 느낌과 정동으로 가득 차 있는 이 공간을 이성적인 논리로 어색하게 만들어야 하는가 하는 걱정이 좀 있습니다. 하여튼, 겸손한 자세로 토론을 해보겠습니다.
여기 보면 이제 미군 기지, 기지촌, 해군 기지 등등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고요. 그런 것들은 한국 영토 내에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의 영토적 주권이 미치지 못하는 공간들이겠죠. 그래서 일종의 예외 공간들이고, 어떻게 보면 영토적 주권이 침해되고 있는 상황이죠. 이런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요? 나쁜 놈들, 양키 고 홈, 이런 격한 말을 하면서 분노를 해야 되는가? 하지만, 이렇게 감정적으로 분노하고 욕하는 것 만으로는 문제를 이해할 수도 없고, 해결책을 찾기도 힘들죠. 좀 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생각을 해보면 이런 예외 공간은 자본주의적인 영토 국가 내에서는 아주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짚고 넘어가야 될 것 같습니다.
밥 제솝(Bob Jessop)이라는 굉장히 유명한 국가 이론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국가 기구의 핵심은 제도와 조직들의 독특한 총체로 구성된다. 사회적으로 용인된 기능은 이것의 공동의지, 또는 일반의지라는 이름으로 사회 구성원들에게 집합적으로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리고 강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가는 공동이익이라는 이름으로 구성원들한테 구속력이 있는 결정을 내리고 강제하는 기구라는 소리죠. 특히 영토적 주권이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논리는, 국가가 영토라는 배타적 공간 안에서 국민들의 보편적 이익을 대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또 인민 주권이라는 개념과 결합이 되면서, 예를 들어 국가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더욱 더 국가가 공동 이익의 대변자라는 논리가 강화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근대적 주권의 이상이 현실에서는 쉽사리 무너지고 무시된다는 거죠. 앞에서 언급했던 예외공간들이 그러한 대표적 예가 될 수 있겠구요. 좀 더 나아가면 국가라는 정치 조직에 내재된 편파성과도 관련이 됩니다. 제솝에 따르면 국가가 겉으로는 공동이익을 위하고, 대변하고, 그걸 통해서 사람들을 강제하는 기능을 행사하는 기구이긴 하지만, 동시에 공동 이익을 위한 일반 의지는 항상 비대칭적이고 일부에게 특권을 부여하지만 또 다른 일부 이익은 무시하고 제한합니다. 이게 국가들의 편파성이거든요. 본질적이고 내재적인. 특히 자본주의 국가 같은 경우에는 일방적 평향성의 논리가 더 뚜렷하죠. 노동보다는 자본을, 공유보다는 사적 소유의 이익을 더욱 편파적으로 보호하는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영토 주권이라고 하는 논리는 내적 모순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게 뭐냐면 국가 이성이라는 합리성의 논리하에서 예외성이 수시로 발현된다는 거죠. 이건 칼 슈미트(Carl Schmitt)가 이야기한 것인데, 슈미트는 국가가 비상 사태와 임시적인 조치 같은 ‘예외적인 것’들을 국가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수행했다고 봤습니다. 쿠데타 같은 겁니다. 쿠데타를 일으키고, 초법적인 조치를 하고 나서 국가는 이것은 국가가 필요하니까 한 것이다, 국가 이성의 이름으로 합리화하거든요. 그것이 예외성이 발현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칼 슈미트의 예외성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예외 공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사람이 아이화 옹(Aihwa Ong)이라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특히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국가가 자신의 주권적 영토성을 스스로 우회하는 수많은 예외적 공간으로서의 특구를 만들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경제특구, 경제자유구역, 산업단지 등. 게다가 어제 오전에 조세 국가 세션에서 제주에서 오신 이태영 선생님께서 한국의 국가는 기업가적인 국가였다는 이야기를 했었죠. 그런 논리를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한국과 동아시아 발전주의 국가는 기업가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고, 그러다 보니까 국가의 이익, 주권적 이익이라는 미명 아래서 국가가 나서서 자본의 축적과 경제적 이익에 도움이 되는 수 많은 예외적 공간들을 만들어 왔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국민들의 주권이 똑 같지 않은 ‘차등화된 주권’의 상태가 발생하는 겁니다. 인민 주권이라는 이 입장하에 모든 사람은 똑같은 주권을 가져야 되지만 예외 공간이 만들어지고 나면 수많은 사람의 주권이 다 똑같지 않은 거예요. 어떤 사람의 주권은 좀 더 혜택을 받고 누군가의 죽음은 무시되고 폄하되는 현상들이 나타나는 거죠.
오늘 발표에서 나왔던 것처럼 미군 기지, 강정, DMZ, 경제특구 등을 통해 수많은 차등화된 조건들이 만들어지고 거기서 수많은 주권자들은 자신의 주권이 배제되고 소외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문제는 이러한 차등화된 주권의 상태를 우리가 어떤 논리를 가지고 비판하고 공격할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쉽게는 인민 주권의 논리로 가지고 갈 수도 있어요. 현재 상태를 비판하면서 다시 인민 주권으로 돌아가자고 할 수도 있겠고, 혹은 일부 커먼즈주의자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국가를 옆으로 제껴두고 우리들끼리 자율성을 가진 큰 단위를 만들어서 가보자라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요. 그런데 저는 그 두 가지 다소 극단적인 선택지 사이에서 보다 실효성 있는 전략이 무엇인가를 고민해 봐야 될 것 같고, 그것이 아마 이 세션을 기획하면서 이승원 선생이 이야기한 국가를 커머닝하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국가를 커머닝하기, 또는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예외 공간을 구축하는 것이 가능한가일 겁니다. 자본주의 국가의 진보적, 급진적 예외 공간이 자본 축적의 논리, 지배적 논리, 또 지정학적인 논리에 복무하지 않은 공간으로서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기존에 국가가 가지고 있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속성을 생각해보면 이게 쉽지 않아 보이죠. 그런데 동시에 또 제솝 같은 사람은 국가가 가지고 있는 공생성적이고 균열적인 성격을 강조하기도 하거든요. 제솝의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국가는 완결된 조직체계, 일관된 내적 체계, 순수한 조직체계, 폐쇄된 작동체계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생산적이고 모순적이며 혼합적이고 상대적으로 개방된 체계이다”. 그리고 “국가는 정책 실천의 저항이고, 그래서 제도적 총체로서 기관은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그리고 할 수도 없다. 국가는 실질적인 주체가 아니고 국가의 권력이라는 것은 국가 안에서 국가를 통해서 작동하는 수많은 행위자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말을 하거든요. 다시 말하면 국가는 굉장히 공고한 조직인 것처럼, 그걸 통해서 권력을 가지고 우리한테 폭력을 행사하는 조직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 수많은 균열점이 있고, 만들어낼 수 있는, 만들어지는, 그리고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 있는 구성적인 개방적인 체계라 할 수 있죠. 따라서 우리는 이런 국가의 성격을 바탕으로 국가의 커머닝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보고요.
그런 차원에서 새로운 헤게모니를 구성하고 국가를 커머닝하는 중요한 전략은 어디서 나올지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국가가 가지고 있는 내재적 편파성을 우리가 빨리 발견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국가가 편파적이지 않고, 공정한 주체이며, 공정한 플레이 그라운드여야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는 결코 그럴 수가 없거든요. 따라서 보편성과 공정의 원리를 가지고 국가의 커머닝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요. 오히려 국가의 편파성을 인정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국가의 특정 이해와 정체성을 기반으로 형성된 기존의 편파성을 공격해야 됩니다. 특히, 기존의 편파성을 공격할 때, 그 편파성이 문제이니 국가가 덜 편파적이고 보다 공정할 수 있기를 바라기 보다는 새로운 편파성을 드러내놓고 만드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국가의 커머닝에 더 유리하다 생각합니다. 예를들어 국가 관료들이 수시로 아주 많이 이용하는 특혜라는 단어가 있는데, 아까 미인도 사례에서 성북구청장이 일부 예술가들이 특혜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지원을 잘라버리는 그런 일들이 전국 곳곳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죠. 그러면서 자신들은 굉장히 공정한 행위자인 것처럼 행위를 하는데, 앞에서도 여러 번 지적했듯이 국가는 절대로 공정하지 못합니다. 매우 편파적입니다. 결국 국가 관료들이 시민사회의 요구를 거부할 때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특혜 시비에 대한 우려, 공정의 논리에 빠져들면 우리는 결코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우리는 공정과 보편성의 논리에 기반을 둔 기존 국가 헤게모니의 균열을 내야 하지 않을까? 근데 저는 이를 위해 좋은 전략이 커먼즈 정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커먼즈 논의는 국가 만이 일반 의지와 공동 이익의 대변자라는 기존 담론에 비판을 가합니다. 특히 공사 이분법적 논리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공동 이익 구현의 담당자로서 비국가적 주체들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관련하여 앞에서 국가가 공정하기 보다는 편파적임을 지적했는데, 그러한 편파성의 부정적 효과를 줄이려면, 국가의 형태가 보다 분산적이고 다중심적이 될 수 있도록 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특히, 참여 민주주의, 직접 민주주의 등의 요소들이 강화되어야 합니다. 또한, 국가 전체 차원에서 보편적인 제도화를 추구하기 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인민적 예외 공간들이 다양한 인민들의 참여와 주도를 통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여지가 생기도록, 국가의 자원과 권한을 분산화하는 그런 제도적 실천이 좀 더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마지막 발표에서 희망을 말하는 것을 보면서 많이 생각이 듭니다. 지금 현재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절망의 감각과 정동입니다. 신자유주의 금융화가 급진전되면서 공동체적 연대의 뿌리가 절단되고 수 많은 사람들이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수 많은 젊은이들이 비트코인, 투기 같은 것들로 향해 내달리고 있습니다. 너무나 절망적인 시대적 상황입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이러한 절망의 감각을 넘어설 수 있게 도와주는 희망의 언어를 발견하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희망의 언어로서 커먼즈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인간과 인간이 만든 사회적 관계를 못 믿다 보니까 시장이나 기술을 믿어야 된다는 식의 논리가 지배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시장과 기술을 믿지 말고 다시 인간을 믿을 수 있도록 끌어들이는 논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커먼즈 논리가 인간에 대한 믿음과 희망의 감각과 정동을 되돌리는데 큰 도움을 주지 않을까 말씀을 드리면서 제 토론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질의응답
정기황: 박배균 선생님의 코멘트였고요. 먼저 플로어의 질문을 받아보고 진행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저도 국공유지와 관련된 내용을 발표하려고 하다가 사회자가 된 건데 힘드네요. 근데 발표 자료를 보고, 한국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박배균 선생님 말씀에 조금 보태서 말씀드리면, 웅덩이나 저수지 같은 거 공유지화될 때, 지금 한국농어촌공사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는데 그런 것들을 뺏어올 때 그 당시 동네 주민들이 쓴 기사가 있어요. 1922년 기사에. 뭐라고 이야기했냐면, ‘이거를 수백 년 동안 우리가 문제없이 운영했는데 니네가 가져가서 그걸 잘한다는 게 무슨 논리냐? 그건 국가만능주의고 과실이다.’라고 하는 지적들이 있어요. 22년에. 근데 실제로 꽤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글이고, 사실 그런 정도 감각도 지금 우리에게 있나? 라는 걸 생각해 봐야 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우리도 잘할 수 있는데 국가가 가져가서 그걸 공정하게 한다는 걸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거잖아요. 그냥 그걸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느낌이 있어서, 그런 감각들을 찾는 것도 필요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플로어 질문 받겠습니다.
Q1. 저는 윤여일 선생님한테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DMZ도 경기권에서 강원권까지 쭉 연결이 되는 거, 하나의 공간이라고 하기가 어렵잖아요. 특히 경기도는 생태, 강원도는 안보, 관광을 강조하는 느낌을 받기도 했었거든요. 이렇게 두 개의 감각, 지방분권으로 인한 이 차이들을, 우리가 DMZ를 바라볼 때 어떻게 가져가야 할까요? 그리고 DMZ 인근 권역에 큰 거점 마을들이 7~8개 있을 거예요. 거점 공간들마다 주민들의 감각이 다 다를 것 같은데, 오늘을 관통하는 단어는 감각인 것은데, 7~8개의 권역을 아우르는 감각은 또 다를 것 같거든요. 근데 이들 간의 연대의 가능성은 없을지? 이걸 느끼셨는지가 궁금합니다.
Q2. DMZ를 비어 있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문제를 뭐라고 규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 인근은 사실 가장 무장화된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향으로서의 평화가 아니라, 현재 DMZ를 마치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유일한 곳으로 바라보거나, 인식하거나, 비어 있음으로 개념화하는 것이 어떤 함의가 있을까요? 커먼즈라는 용어가 도대체 무엇인지 3일 동안 물음표가 가득한데, 평화라는 차원에서 이러한 논의가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윤여일: 저는 DMZ가 비어 있다기보다는 비어 있다고 여겨져서 무언가를 자꾸 채우려고 한다는 데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어요. 사실 DMZ는 개성공단이 가동되던 때 오염되기도 하고, 인근 주민들한테는 토지 활용이 제약되어 개발을 못 하는 골칫거리이기도 하겠죠. DMZ는 사실상 투명하지도 않고, 비어 있지도 않습니다. 많은 것들로 때묻어 있고 여러 힘들이 가해지고 있는 걸 전제하고 말씀을 드린 건데요. 그리고 경기도와 강원도의 차이에 대해선 청중으로 계신 OOO 선생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실 것 같아요.
저도 하나만 논점을 끄집어내도 된다면, 아까 박배균 선생님이 말씀하신 예외 공간 말인데요. 예외 공간은 예외적인가? 라는 질문이 가능할 것 같아요. 예외 공간이 국가주권의 폭력성이 드러나는 곳이라고 한다면 대통령이 있는 용산보다 강정이나 춘천의 캠프 페이지, 그리고 다른 발표자 분들이 소개해주신 곳들에서 주권의 폭력성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외 공간인 그 주변부들은 일반 공간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곳들은 버거운 조건과 어두운 역사를 간직하고 있잖아요. 때문에 거기서 무언가를 해내려 한다면 마치 댐에 막혀 수위가 올라가는 것처럼 어떤 가능성이 고양될 여지가 있는 것 같아요. 예외 공간 그 자체는 예외적이지는 않지만, 예외 공간에서는 무척 특징적인 것이 생겨날 수 있다는 걸 오늘 발표를 통해서 느꼈습니다.
정기황: 또 질문 받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Q3: 저도 오늘 세션 너무 재미있게, 눈물을 흘리면서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엄문희 선생님과 김현주 선생님께 질문이 있는데요. 김현주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도시재생의 주체가 누군지 너무 궁금했거든요. 사실 도시재생의 다른 사례들을 보면 기업 공간도 만들고, 선생님께서 하시는 여러 가지 작업과 일맥상통하는 작업들도 많이 해 왔는데 여기는 왜 그렇게 됐을까? 하는 질문이 들어서 선생님께서 설명을 해 주시면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리고 엄문희 선생님 발표를 들으면서 저도 프라이드를 잃어가는 절망감, 정동을 함께 들은 것 같아서 너무 먹먹했는데 혹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긍심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다시 자긍심을 회복하는 어떤 작은 희망을 발견한 게 있으신지? 어떻게 지금까지 계속 활동을 이어가고 계신지 약간 실낱 같은 그런 것들이 있으신지 좀 궁금했습니다. 감사합니다.
Q4: 공통으로 드리는 질문인데요. 엄문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운동 공간에서 도덕적 트라우마로 인한 상처와 치유,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동시에 그 운동 현장이라는 것은, 커먼즈 관점에서 생각을 하는 것인데요. 그 안에는 마지막 발표에서도 알 수 있듯 주체의 경합이 있고 동시에 기쁨과 같은 부분도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있어야지 운동의 동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다르게 얘기하면 어떤 희망, 언어로서의 커먼즈라고 할 때 운동 속에서 느끼게 된 어떤 기쁨이라든지, 재미라든지 이런 부분들은 또 어디서 실제로 느끼셨는지? 그런 것들을 이제 나눠주실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김현주: 작년에 두레방 앞에서 ‘기억 항해’라는, 지역 투어 기반의 한 공연을 진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근데 공연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재단에서 전화를 받았어요. 급하게. 재단에서 홍보물에 있는 두레방이라는 이름을 다 삭제해 달라고 그래서, 저는 그렇게 할 수 없고 이미 열흘 전에 모집이 다 끝났다. 홍보물은 그냥 지금 띄워져 있을 뿐 더 이상 관람객을 모집하기 위해서 띄워놓은 것이 아니다, 이미 다 마감이 됐다. 이거를 변경할 이유도 없고 변경할 필요도 없다고 얘기를 드렸는데 그분이 굉장히 애절하게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바꿀 수 없고 필요하시다면 재단 측에서 하십시오, 하고 그냥 전화를 끊었거든요. 왜 일개 미술가가 하나의 마을에서 공연을 하는데 왜 장소를 검열하고 삭제하라고 하는 걸까? 저는 그게 남들한테만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저한테 일어나니까 놀랐어요.
그리고 치졸하게 느껴진 게, 관에서 그걸 원한다면 그 의견을 가진 분이 직접 와서 이야기해 주셨으면 좋겠다. 근데 기억 항해라는 것이, 기억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그 장소를 통해서 기억을 하는 것이고, 항해라는 것은 걸으면서 감각하는 활동인데 지금의 관은 기억하는 것도, 감각하는 것도, 모이는 것도 두려워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언뜻 했었습니다. 지금 빼뻘마을에서 하고 있는 사업은 정확하게는 샛별마을 사업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어요. 기금 사업을, 공모를 통해 선정되어서 의정부시의 주도하에 진행하고 있는 사업인데 센터장이 두 번 바뀐 상황이고, 재생 사업이 예술가와 협력해서 재미있게 할 수 있는데 왜 이곳은 그렇게 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이 제가 하고 싶은 질문이기도 해요.
그런데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감정, 특히 윗세대가 갖고 있는 감정 중에 하나가 수치심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거든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과정조차 얻지 못한 분들이, 주민 분들이 대다수예요.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것들에 대해 자세히 안내해 주거나 그분들의 이야기를 경청해 주지 않았던 것이 지금까지의 사회였던 것 같아요. 근데 그 안에는 항상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있었고, 의정부시뿐만 아니라 국가가 갖고 있는 수치심이 있는 것 같아요. 근데 그 수치심이, 마을 주민들이 갖고 있는 것과 국가가 갖고 있는 게 되게 다른 것 같아요. 이게 어디서부터 발현되었는지 따져 묻고, 사람들의 감정을 온전히 경청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소통하지 않고 묵인하는 과정에서 단지 이 지역을 좋게 만든다는 슬로건만 있는 거죠. 첫 출발점부터 시작하지 않고 위에서부터 출발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엄문희 선생님께서도 이야기하셨지만 현장에서도 소위 이것에 반대한다, 가치가 있다, 없다, 하는 양분화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들어와서 놀 수 있는 거리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시민들, 주민들도 들어와서. 이분들이 두레방이나 이런 데 첨예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는 게 아니라 놀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서 우선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만나고, 소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경계심을 느끼는 거고, 알지 못해서 그런 마음들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문화예술이 가지는 힘은 그것들을 연결하고, 얘기할 수 있게 놀 수 있는 장. 누구든 얘기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것이 그 지역 현장에서는 제가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기황: 이제 마무리 발언 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다들 마지막으로 한 마디씩 해 주시면 될 것 같은데요.
엄문희: 긍지를 잃어버린 사람들, 도덕적 모멸감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것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가에 관한 질문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발표할 때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기록 자체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두 번째는, 이걸 제가 말 못했죠. 우리 자신이 커먼즈를, 외부에 존재하는 무엇인가, 혹은 현상, 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저는 우리 자체가 어떤 결과로 나온 커먼즈의 일부가 아닐까 느껴요. 오래 전 사건인데, 다시 소환하게 된 사건인데 마을에서 천막을 접어야 하는 상황이 됐고 며칠 동안 회의를 길게 하면서 절망감에 빠져 있었고, 우린 졌어. 아무것도 한 게 없어. 그런 데 빠져 있는 무기력한 회의였어요. 근데 일주일 전에 들어온 활동가가, 그렇지 않다고. 당신들이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라고, 안 싸웠으면 나 같은 사람이 들어오지 않았을 거다. 그걸 알아도 참여하지 못했던 이들이 이제서라도 들어오지 않았나. 내가 바로 당신들 투쟁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지금 싸우고 있는 우리 자신이 커먼즈 그 자체라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때 그 말 했던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박정환: 저는 개인적 기억을 가지고 미군 기지를 소환해 봤는데요. 한편으로는 주어진 주제 중에서, 국가, 예외공간, 헤게모니 중에서도 고민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정치철학자들은 예외 공간을 만드는 데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간다고 해요. 어떤 예외 공간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차별이나 선택적 포섭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요. 근데 미군기지는 예외 공간을 어디서 갖고 왔느냐? 물론 안보로 만들어지는 예외 공간이라 그렇겠지만 국가 권력을 억압하는 거죠. 국가 공간이 갖고 있는 엔트로피를 최소화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예외성을 만들거든요. 구획화라는 것도, 공간적으로는 구획화되지만 장소적으로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 정도로 엄청난 영향을 사람들에게 끼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커먼즈로 예외공간을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 에너지를 지금 국가의 방식처럼 엔트로피를 낮추는 게 아니라 그걸 더 높이는 방향을 고민해 봤습니다.
엔트로피가 무질서가 아니라 사실은 자유로움인 거잖아요. 그걸 커먼즈적 전략을 써 보면 어쩌나, 했는데, 그렇게 엔트로피를 높여서 열심히 활동을 하고, 투쟁하고 싸워도 안 되잖아요. 국가를 상대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건가? 활동을 통해서 새로운 예외공간으로 만들 수 있는 걸까? 이런 의심과 절망이 더 들기도 해요. 물론 춘천의 경우는 싸워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빈 땅도 있고요. 여기 뭘 넣어야 될지, 국가, 행정이 이야기하는 산업단지, 아파트단지를 넘는 걸 제안하지 못해요. 시민사회에서는 공원을 만들자고 하는데, 커먼즈적 대안을 만들자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 고민이 됩니다. 국가는 어떤 관계를 유지할 거냐. 싸울 거냐? 유연하게 넘나들면서 그들을 포함시키는 전략을 세울 거냐? 이 지점이 사실은 지금 춘천의 실험에서는 아직 투쟁도, 협상도, 타협도 안 해 본 새로운 예외 공간을 만드는 모색으로 이어질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이채원: 국가의 균열점을 찾아가서 다양한 예외 공간을 커먼즈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권리가 필요한 것에 되게 공감하는데, 그런 얘기를 들으면 어떻게 하지? 라는 고민이 늘 들어요. 근데 박배균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희망이라는 언어가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지금 여기서 우리가 다섯 개의 발제를 들으면서 만들어진 정동들이 밖으로 뻗쳐 나가는 것이 결국 커머너를 모집하는 일종의 과정인 것 같고, 오늘의 세션이 의미 있었다고 생각하는 건 다양한 전략과 언어를 통해 현장의 관점에서 커먼즈를 발화하는 일이 되게 필요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미인도의 이야기를 주민들에게 전달할 때 너무 어렵다는 말을 항상 듣는단 말이에요. 미인도는 기존의 방식으로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겠죠. 실험의 공간이었고, 그게 성북문화재단의 사유재산이 아니었다는 걸 주민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어요. 그래서 이걸 쉽게 풀어낼 수 있는 언어를 고민해야겠고, 이런 것들이 절망의 언어로 다가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이게 저 개인으로만 보면 삶을 바꿀 만큼 엄청 중요하고 행복한 공간인데, 이런 것들을 커먼즈라는 개념 자체로서 희망을 담아 전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많은 제 또래 청년분들이 다들 흩어져 있고, 뭔가에 단절되어 있는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는 걸 종교적 믿음처럼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안에서 가시화되는 어떤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개인적으로 고민하는 건, 겨울에 이 투쟁을 브랜드 컨설팅을 받아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적진의 끝자락에서 그들을 포섭해 오겠다는 전략을 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커먼즈가 뭐야? 너무 어려워, 하는 말을 항상 들어서 그런 것 같은데, 희망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정기황: 말씀해 주신 것처럼 예외 공간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 같은데, 반대로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 가능성이 열린 시대가 도래할 것 같다는 느낌이 일단 있고요. 요즘 의정부는 미군기지 관련한 걸 시민들의 자산으로 만들겠다는 운동을 하고 있고, 미인도도 마찬가지로 나가라고 하는데 안 나가고 버티고 있고, 혁신파크 같은 데도 사실 점거운동 하고 있죠. 최근에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사례 중 하나라도 활동을 통해 전환되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열릴 것 같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다른 공간도 마찬가지인데, 저는 제일 짜증 나는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특혜라고 이야기하면서 뒤로는 민원이 많아요. “다른 사람들이 싫어해요. 다른 시민들은 관심 없구요.” 아무 관심 없는, 뒷짐지고 있는 사람들을 데려와서 그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말을 하거든요. 이런 고민들을 조정하는 단계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까지 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일자 | 2024.11.23
장소 | 커먼즈필드 춘천
토론자 | 박배균, 윤여일, 박정환, 김현주, 엄문희, 이채원
사회자 | 정기황
발행인 | 박배균
편집장 | 이승원
편집 위원 | 김세환, 문지석, 송민석, 심여은, 윤수진, 윤형준, 한승지
발행처 | 서울대학교 아시아도시사회센터, 시ᆞ시ᆞ한 연구소
발행일 | 2025년 1월 31일
*2021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음(NRF-2021S1A5C2A03088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