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광장: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의 거품, 소음, 웅성거림 | 김현주 A.C. 클리나멘, ㅃㅃ보관소

1월 3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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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커먼즈 포럼 3 <국가를 커머닝하기>

숨은 광장: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의 거품, 소음, 웅성거림

김현주 (A.C. 클리나멘, ㅃㅃ보관소)


안녕하세요. 미술 작업을 하고 있는 김현주라고 합니다. 앞서 소개해 주신 대로 저는 경기도 의정부시에 위치한 빼뻘마을(뺏벌로도 표기)에서 ㅃㅃ(빼뻘)보관소, 예술 공간 송산반점이라는 두 개의 커뮤니티 예술 공간을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2019년도부터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매해 주민들과 함께 다양한 예술작업들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이 이미지는 빼뻘마을을 위에서 촬영한 모습입니다. 파란색 지붕으로 밀집된 곳이 마을이고, 마을과 바로 인접하여 형성된 우측 일대가 캠프 스탠리입니다. 지금 보시는 이 곳은 2019년에 거점예술공간으로 활용했던 오래 전 폐업한 미군 전용 클럽(킹클럽)입니다. 이곳을 커뮤니티 예술 공간으로 사용하면서 인터뷰, 워크숍, 전시, 공연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공간을 활용 했습니다. 지금 보시는 장면에서 좌측에 있는 곳이 현재 운영하고 있는 빼뻘보관소, 그리고 우측에 있는 곳이 송산반점입니다. 빼뻘보관소는 ‘Hill Side’라는 바Bar로 2017년까지 운영되었던 곳이고 송산반점은 인천 개항기에 이주해 오셨던 대만 1세대 이주민분이 2대에 걸쳐 1980년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장사를 해오셨던 중식당입니다. 어떻게 보면 방치된 채 남아있는 마을의 공간들을 예술 거점 공간으로 활용을 해 왔어요. 현재 이 두 공간을 마을의 예술거점으로 두고 다양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데요. 오늘 제가 이야기드리려고 하는 것은 한국전쟁 이후 형성된 빼뻘마을에 대한 대략적 소개와 마을 초입에 위치한 ‘두레방’이라는 장소가 마을 재생에 의해서 현재 겪고 있는 상황들에 대한 것입니다.

뺑, 뺑대가 사라진 기지촌 – 빼뻘

‘빼뻘’이라는 마을이름이 생소하실 텐데요. 주민분들한테 ‘마을 이름이 왜 빼뻘이에요?’ 여쭤봤더니 ‘뺑’, ‘뺑대’로 불리우던 풀들이 이 일대에 가득 자랐었다고 합니다. 그 모양이 뻘과 같아 뺑뻘로 불리다가 빼뻘이 되었다고 해요. 대보름이 되면 팔 두께 정도로 뺑대들을 모아 자기 나이 수 만큼 끈을 묶어 뺑대에 불을 붙인 후 보름달을 향해 소원을 빌면서 놀았대요. 2019년도 마을에서 프로젝트를 하던 첫 해 주민분들에게 대체 이 뺑이라는 풀이 어떻게 생겼냐라고 여쭤봤는데 마을의 한 할아버지께서 직접 뺑풀의 모양을 그려주시면서 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여긴 원래 아무것도 없었어, 뺑대만 가득했다구.’

현재 미군기지가 있던 자리는 일제시대에는 일본 군이 땅을 점유하고 있었고, 한국전쟁 이후 1952년 일본군이 떠난 자리에 캠프스탠리가 들어서면서 기지촌이 형성된 거죠. 사실은 이 마을은 어떻게 보면 없었던 마을이고, 겨우 70년을 조금 넘은 오래된 마을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을 이름에 대한 유래 중 ‘한 번 들어오면 빼도박도 못한다.’라는 설이 있는데요. 그만큼 빠져나가기 어려운 기지촌의 특수한 삶의 상징성이 담겨져 있어요. 그러한 기지촌의 상징성을 드러내고 있는 ‘뺏벌’이라는 안일순 님이 쓰신 장편소설도 있습니다. 첫 해에 만난 할아버지께서 마을 밖에서 풀을 찾아 꺾어다 주셨는데 뺑대는 기지가 들어서면서 사라졌고 달을 보며 소원을 비는 놀이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지금 보시는 지도는 의정부입니다. 의정부에는 총 10개의 미군 기지가 주둔해 있었고요. 이 작은 땅에 시민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구역이 10개나 있었던 거예요. 제가 의정부에 산 지가 이제 7년 차 정도 됐는데 처음에 굉장히 좀 의아했어요. 걸어다니다 보면 들어갈 수 없는 금지된 구역들이 있거든요. 이곳에 왜 들어갈 수 없는 거지? 알고보니 노는 땅이 아니라 오염된 기지였던 땅이 쉬고 있는 것이었어요. 또 미군 기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경계, 긴 담장 자체가 낯설었기 때문에 그 담장 너머가 굉장히 궁금했었던 거죠. 경계에 익숙해지다 보면 그 곳이 더 이상 낯선 장소가 아닌 게 되더라고요. 금단의 땅에 익숙해진 그런 삶의 모습이 타자인 제 입장에서는 또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 많던 미군 기지가 대부분 반환되었는데 캠프 스탠리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상황이고요.

빼뻘마을 프로젝트를 오랜 시간 지속하게 되면서 캠프 스탠리 너머 미군 기지에 대한 관심이 확장되더라고요.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인데 미군 기지가 가장 많이 주둔하고 있는 나라 중에 우리나라가 전 세계 3위 더라고요. 전 세계에 약 800개의 미군 기지가 주둔하고 있고 미군기지가 가장 많은 나라 중 독일이 얼마전까지 1위였는데 일본이 1위를 탈환을 했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일본이 1위, 2위가 독일, 그리고 3위가 우리나라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미군기지들을 파악하면서 미군 기지 이름이 과거와 달리 한국식으로 되어있어서 파악하기가 굉장히 애매하고 좀 어렵더라고요. 예를 들면 제주 강정에 있는 기지의 경우도 실제로는 미군 기지로 활용되고 있는데 제주민군복합형관광미항이라고 이름을 지었잖아요. 진해 해군기지의 경우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래서 민간인들이 잘 알수 없게 점점 더 교묘한 방식으로 남의 땅을 점유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999번길, 1번 마을버스, 사라진 뺑풀과 예술

빼뻘. 송산동 999번 길. 이름 되게 특이하죠. 999번 길이에요. 근데 의정부에서 빼뻘로 가는 버스가 1-1번이에요. 그 1번 버스가 유일하게 마을을 연결하는 교통수단이고요. 1을 더하면 1000이 되는데 바깥과 마을을 연결해주는 이 1번 버스가 상징적으로 느껴졌어요. 저는 사라진 마을의 풀 뺑대나 1번 버스가 예술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여겼어요. 밖으로 연결해주고 사라진 놀이를 부르는. 소문을 내주고 뭔가 함께 웅성거려 줄 수 있는 게 예술이다! 이러면서. 

빼뻘이 위치한 땅 주변을 보면 우로는 미군 기지와 의정부 교도소, 위로는 수락산, 좌로는 흑석마을, 맞은편은 아파트 뉴타운과 택지개발사업이 한창 이루어지는 곳이에요. 미군기지가 있던 자리 중 일부는 농지였는데 일본군이 일제강점기에 헐값으로 빼앗았다고 하고, 흑석마을은 기지촌 빼뻘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분들이 오래전부터 살고 샆어하시는 전원마을입니다. 맞은편 새로지은 아파트촌으로 이사가고 싶어하시는 분들도 많죠. 

빼뻘 마을에는 과거만큼이나 현재에도 다양한 분들이 살고 계세요. 예전에 미군들을 상대로 경제활동을 해오셨던 원주민분들도 계시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이주해 들어오신 분들, 외국인 노동자. 독거 노인분들이 많이 사세요. 맞은편에 아파트를 짓고 있다 보니 일시적으로 건설 노동을 위해 이주해 오신 분들이 이곳 쪽방에서 많이 사시게 되었죠. 과거에는 쪽방이 기지촌 여성분들이 살던 공간이었는데, 그분들이 나가시자 외국인 노동자분들이 살게 된 그런 상황입니다. 그리고 또 점집이 많아졌어요. 어려운 동네에 점집들이 생기는 것 같아요. 아까 캠프 페이지 반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지가 있었던 주변 일대는 또 무엇이 새로 생겨나고 무엇이 사라지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빼뻘에는 주민분들이나 시에서 주민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장소의 사람들. 빼뻘보관소, 두레방. 그리고 2022년에 들어온 마을 재생사업단이 있습니다. 마을에 살지 않는 토지주는 마을 주민이고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은 몇 십년을 살아도 어떤 선택이나 권한을 행사할 수 없는 게 현실이더라고요.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면 모두 마을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마을의 땅과 건물을 소유한 사람이어야 어떤 권한을 갖게 되는 거에요.

마을 재생사업단이 들어오면서 제가 지역에서 주민들을 만나 해오던 활동 방향성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요. 사실은 마을 재생 사업단이 들어오던 초기에는 환대했었고 기대도 했어요. 참 열악한 동네인데. 여전히 연탄을 떼고 도시가스도 들어와 있지 않고 수도시설도 되있지 않은. 게다가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도 어려운 분들이 많이 사시는 곳이다 보니 이런 부분에서 마을의 기본적인 시설을 정비하고 쾌적하게 하는데 지원해 줄 수 있는 사업이 아닐까 기대를 했었죠. 그런데 지금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제가 주로 하는 작업 중에 하나가 빼뻘마을과 관련한 것들을 아카이브하고, 마을 배움터 활동을 통해 주민분들을 지속해서 만나는 건데요. 이 지역에서 살고 계신 원주민 대다수의 분들이 과거에 클럽을 운영하셨거나 세탁소, 음식점, 선물가게, 미장원 등을 운영하셨던 분들. 그런 분들이신데, 이분들이 이곳에서만 40~50년 이상 살고 계시다 보니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일들이 굉장히 좀 드물었던 것 같아요. 기지촌이라는 곳이 폐쇄적이기도 한데 빼뻘은 특히 고립된 섬 같은 곳이에요. 그래서 빼뻘에서 진행되는 예술활동들을 통해 주민분들에게 새로운 감각들을 접속하게 해 주는 그런 역할들을 하고 있는 거라고 얘기를 드리고 싶어요. 지금 사회가 같은 것 같은 다른 것, 다른 것 같은 같은 것들만을 추구하는 사회가 되가고 있는 것 같아요. 다른 것과의 접속은 늘 중요하고 그 접속을 통해 다양성이 형성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양성이 생긴다는 게 보이는 경계를 유연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 사진은 이제 빼뻘 지역에서 제가 인터뷰를 하고 주민분들과 만난 모습들이에요. 일종의 마을 가족 사진 같은 건데 이 사진을 공간에 걸어놓았을때 주민분들이 가장 먼저 하는 반응이 뭐냐면은, 뭘 것 같아요? 맞아요. 나 어디 있지? 제일 먼저 자기 자신을 찾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아는 사람들을 찾아요. 관심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그다음에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하세요. 사진 안에는 어떻게 보면 임대인과 임차인, 그리고 땅을 산 사람과 사지 못한 사람, 서로 경계를 갖고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이 사진 안에 같이 공존하게 되요. 그러면서 만나지 않는 사람,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 이웃을 떠올리게 되고, 그 사람에 대해서 다시 말하게 되고, 기억하게 되는 어떤 그런 역할들을 하게 되는 사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진 찍는 거를 허락하지 않은 분이 계셨는데 사진을 보시면 ‘왜 나는 여기에 없어?’라고 물으시더라요. 자기 사진도 넣어 줬으면 하는 어떤 바람을 얘기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아, 사람들은 연결되고 싶어 하는구나라는 것들을 좀 느꼈습니다.

이건 리서치를 통해 아카이빙한 캠프 스탠리의 모습들이고 나머지는 제가 기록한 지역 일대의 모습들입니다. 이곳에서 ‘걷기’, ‘산책’, ‘마을 투어’라는 이름으로 마을을 걷는 활동을 많이 진행했었고, 지금도 빼뻘 마을에 누군가 오신다고 하면은 마을 일대를 걷는게 주요한 활동입니다. 나름대로 오랫동안 하다 보니까 마을을 어떻게 걸어야 되는지에 대한 어떤 맵핑이 형성이 되더라고요.

성병검진소와 두레방의 공존 그리고 나물할머니의 기억

마을 내 다양한 주민분들을 인터뷰해왔고 그 분들의 구술을 책이나 예술적 퍼포먼스를 통해 확장하는 것이 일종의 어떤 저항이라고 해야 되나? 보이지 않는 주민들의 삶의 목소리가 사회를 향한 큰 저항이라고 생각해서 책을 만들거나 마을주민들의 목소리를 낭독을 통한 참여적 퍼포먼스로 확장하는 작업을 해왔는데요. 올 해에는 <거품 소음 웅성거림> 프로젝트를 통해 두레방 활동가분들의 목소리를 담고자 했고 전원장님이셨던 유영님선생님을 인터뷰 한 적이 있어요. 

마을 지도를 보시면 여기가 출입구거든요. 출입구가 하나죠. 호리병 모양과 똑같지 않지만 나오고 들어오는 곳이 하나인 폐쇄적 구조가 닮아 있어요. 마을의 관문이라고 볼 수 있는 초입 자리에 있는 곳이 바로 두레방입니다. 유영님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기지촌 여성분들이 두레방에 상담을 하기 위해 들어와 있으면 바들바들 떨었대요. 클럽 포주가 앞을 지나가면서 보게 될까봐. 계시는 동안 마을 포주분들과 큰 마찰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침마다 두레방에 오시면 아무 일 없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리셨다고 해요. 

이게 두레방의 현재 모습이고 이거는 1987년 초기 마을 안쪽 골목에 개소를 한 이후 촬영된 두레방의 옛 모습인데요. 이곳에서 주로 기지촌 여성들의 자활을 돕기 위한 다양한 치유적 활동, 공동 식사, 기지촌 여성 자녀 돌봄 활동들을 해오셨습니다. 그런데 마을 재생사업의 일환인 새뜰마을사업이 시작되면서 현재 위치한 두레방 공간을 마을커뮤니티 공간으로 만들어야 되기 때문에 이 공간을 비워주십시오. 프로젝트를 시작했던 당시만 해도 2024년 6월 까지 이전하라는 권고를 받은 상황이었는데, 현재는 2025년 6월까지 유보된 상태예요. 이전 권고 소식을 듣고 난 2024년 1월에 바로 관련한 프로젝트를 해야겠다 계획을 하게 되었죠. 프로젝트와 관련한 행사는 끝났지만 지속되어야 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두레방은 1986년에 의정부 가능동 CRC(캠프 레드 클라우드)에 인접한 곳에 처음 개소를 했다가 당시 빼뻘이 기지촌으로 훨씬 더 활성화 된 상태였고 여성분들이 훨씬 더 많았다고 해요. 그래서 1987년에 빼뻘로 이주해서 현재까지 기지촌 여성들이 처한 다양한 어려움들을 돕고 있어요. 이 공간은 본래 의정부시 고산 성별 진료소라는 이름을 갖고 여성들의 성병 검진을 했던 곳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여성들이 이 문 앞에 쭉 줄을 서서 무조건적으로 성병 검진을 받아야 했다고 해요. 패스를 들고 정기적인 검사를 받지 않으면 큰 문제가 되었는데, 이 곳에서 검진 결과가 양성 반응이 나오면 동두천 소요산에 위치한 성병관리소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과다한 양의 페니실린 주사로 사망을 하시기도 했다는 자료들을 보셨을 겁니다. 지금까지도 신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갖고 계신 여성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성병 검진은 여성들의 건강을 돌보기 위함이 아닌 그야말로 기지촌의 돈벌이 수단으로 여성들을 ‘관리’하기 위해 행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영님 선생님은 21년 동안 두레방 원장님으로 계셨던 분인데 이분께서 저한테 하신 말씀이 건물에 들어오면 한기가 느껴졌다고 해요. 처음에는 성병 검진소 였던 건물이었는 200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캠프 스탠리에 있는 미군 병력이 감축되었고, 이에 따라 기지촌 여성들 수도 줄었죠. 그러면서 2000년대 초반부터 두레방이 의정부시 고산 성병 진료소 내에 있는 공간 하나를 얻어 사무실로 활용하면서 공존을 하게 됐는데, 성병진료소를 아얘 철수하게 되면서 두레방이 전체 공간을 사용을 하게 되었어요. 두레방은 현재까지 의정부시에 매달 꼬박꼬박 임대료를 내고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이분(두레방 여성)한테 두레방 건물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들었는데 이분을 저는 ‘나물 할머니’라고 불러요. 대단한 나물 채집가셔서. 1968년에 빼뻘마을에 오시게 된 할머니는 당시의 건물의 모습과 성병관리소가 왜 여기에 지어졌는지 자세히 기억하고 계셨어요. 깜짝 놀란 게 의정부시에서 지은 건물인 줄 알았는데 마을 포주들이 돈을 모아 지은 건물이라고 전하시더라고요. 빼뻘에서 의정부시에 있는 큰 병원으로 검진을 받으러 가는 도중 여성들이 이탈을 하게 되는 거예요. 도망가는 거죠. 그 이탈을 막기 위해서 마을 포주들이 돈을 모아 건물을 지었다는 거예요. 이후에는 시가 건물을 매입해 관리하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거품 소음 웅성거림의 광장, 두레방

무조건 이 공간을 비우라는 권고에 두레방과 연대하시는 많은 시민들이 올해 초부터 본격적인 집회를 시작헀어요. 현재 두레방뿐만이 아니라 소요산 성병관리소도 동두천시에서 없애겠다라는 상황이라 동두천에서도 철거를 막기 위한 집회가 지속되고 있구요. 성병관리소는 두레방과 달리 오랫 동안 방치된 곳이라 폐허가 된 상태이고 감옥과 같은 구조로 폐쇄성이 짙어서 공간에 들어서면 과거에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곳입니다. 동두천시는 시민들과의 협의 없이 무조건 철거하려는 입장인데요. 그래서 이 심각한 상황들을 어떻게 해야 되나, 그리고 나는 이런 상황속에서 무얼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했죠. 또 두레방이 왜 빼뻘에 있어야 하고 건물이 유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답을 찾아나가게 되면서 사태를 더 심각하게 인식할 수 있었고 프로젝트에 대한 설득력과 방향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심각한 문제일수록 뭔가 되게 귀엽고 경쾌하게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제가 탄산수를 좋아하는데 마셨을 때 ‘캬~’하는 시원함과 보글거리는 탄산의 소리, 물의 유연함을 떠올리게 됐어요. 물은 어디든 흘러감에 따라 스미면서 영향을 끼치잖아요. 물의 유연함과 톡톡 터지는 경쾌함, 여성들의 수다를 연상케 하는 귀여운 웅성거림들? 이러한 프로젝트의 방향성이 지역 안밖으로 공감을 일으키며 확산될 수 있겠다. 그러면서 마을주민들과 두레방 공동체를 잇고, 시민과 두레방을 연결하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거품, 소음, 웅성거림>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두레방에서 일하고 계신 기지촌 여성 활동가 분들의 목소리를 듣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는데요. 막상 활동가분들을 만나면서 존경하게 되는 마음 말고도 어떻게 이렇게 살지? 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진짜 수명이 닳겠다. 시간을 단축하면서 사는 사람들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어떻게 보면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할 일들인데. 들으면서 활동가분들이 처한 상황과 이 분들의 목소리를 바깥으로 알려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절실했었습니다. 기지촌 여성들을 돌보는 활동이 곧 기억하는 것이고 기억하는 것이 우리에게 왜 또 중요한지를 느끼게 되었죠. 

두레방에서는 10년 넘게 기지촌 여성분들과 함께 미술 치료 워크숍을 진행하셨어요. 그간 그려진 그림들 중 두레방이 보유하고 있는 그림들을 모아 사진으로 촬영해서 데이터화 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림을 통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정서와 보이지 않는 서사들이 응축되어 있었는데 이 중 일부 그림들을 전시했어요. 그림에는 자연풍경이나 추상화 등 다양했는데 임신한 부엉이나 거미, 나무 등이 종종 등장하는 게 특징이었습니다.

외부에서 오신 분들이 마을을 직접 걷고 보며 느끼는 경험이 무척 중요해요. 제가 있는 건물 옥상에 올라가면 미군 기지가 쫙 내려다 보이죠. 우리가 지금 이렇게 들어가지 못하는 땅에 살고 있구나, 전쟁과 분단에 대한 현실들, 그 장소를 직접 감각할 수 있는 것들을 매개하려고 했습니다. 

여기가 두레방이거든요. 바로 미군 장벽이 보이죠? 한 기지촌 여성이 억울함에 미군 담장을 뛰어넘어 들어가 못 받은 외상값을 받고 돌아온 이야기들도 있는데요. 참 용감하죠. 기지 담장과 두레방 사이에서 줄넘기를 했어요. 이것이 비단 두레방의 문제가 아니라 평생을 살아왔음에도 기지촌 여성들을 주민이 아닌 다른 집단으로 인식하는 문제, 소수인 두레방 여성과 활동가들이 다수의 마을 주민을 위해 양보해야한다라는 다수자 원칙의 근거 없는 망상과 폭력성 등 넘어야 할 경계들을 놀이로 전환하고 싶었습니다. 

이야기들을 좀 정리하면 이 자리에 마을재생 사업 관련 일을 하고 계신 분이 여기 계신지 잘 모르겠어요. 이런 장소에 꼭 그런 분들이 같이 계셨으면 좋겠다. 그분들이랑 대화하려고 굉장히 애를 썼는데 계속 저를 배제시키더라고요. 제가 도움을 들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그냥 배제시키세요. 대화하고 싶지 않은거죠. 이걸 어떻게 다시 포용하고 같이 테이블에 앉아서 마을 얘기를 해야 할까? 이게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입장이고 좌표인듯 합니다. 마을 재생 사업이 동네를 이간질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주민들이 어떤 재생을 바라는지 먼저 물어보는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너무 당연한 의견을 갖고 있어요. 

저의 바람은 두레방이 기억터, 배움터, 박물관으로 거점화되는 것이에요. 전쟁으로 형성된 기지촌의 문제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현재로 지속되고 있는 문제잖아요. 기지촌평화박물관이 형성되면 미군 기지를 당연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견제’하는 기능을 하게 되요. 기지촌박물관은 현재 상황을 잊고 사는 것이 아닌, 현재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 계속 주시하면서 감각할 수 있는 매개의 장소가 될 수 있어요. 이러한 부분에 대한 시민들과 시의 공감이 중요하고 이를 위해 대화가 이어질 수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프로젝트를 진행과정에서 포럼을 열었는데 당시 문화연대 위원장으로 계신 이원재 선생님께서 아론 말씀을 하셨어요. ‘생태와 사랑, 그리고 시간에 대한 존중이 없는 도시재생은 있을 수 없다. 1년 유예가 아닌 60년의 성찰로 다양하게 수행해야 된다. 그리고 두레방 공동체를 시민들이 함께 축적하고, 의미화하는 커뮤니티의 형태가 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소설 <전쟁 같은 맛>의 그레이스 M. 조 작가님이 얼마 전에 동두천 집회 장소에 오셨어요. 그 분의 어머니께서 탈지분유의 맛을 ‘전쟁 같은 맛’이라고 표현 하신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전쟁 세대인 1930년, 40년대에 태어나신 분들이 탈지 분유를 먹었을 때 당시 소화를 못 시키고 구토나 설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이걸 먹지 못하는, 받아들일 수 없는 세대였던 거죠. 그런데 저에게 탈지분유는 맛있고 고소한 ‘그리움의 맛’인 거예요. 전쟁 후 세대인 저나 젊은 세대에게 ‘전쟁’이란 공감하고 체화하기 어려운 한계가 분명히 있어요. 이런 가운데 구멍난 땅의 지금, 현재를 어떻게 보고 기억할 것인가라는 고민이 이어집니다.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 | 김현주


발행인 | 박배균

편집장 | 이승원

편집 위원 | 김세환, 문지석, 송민석, 심여은, 윤수진, 윤형준, 한승지

발행처 | 서울대학교 아시아도시사회센터, 시ᆞ시ᆞ한 연구소

발행일 | 2025년 1월 31일

*2021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음(NRF-2021S1A5C2A03088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