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정치: 무엇을 돌볼 것인가? | 권범철 서교인문사회연구실

1월 3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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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커먼즈 포럼 1 <돌봄으로의 전환에서 돌봄을 위한 전환으로>

세션 1 – Commons, 모두에게 좋은 삶을 위한 이야기

돌봄의 정치: 무엇을 돌볼 것인가?

권범철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안녕하세요. 서교인문사회연구실 권범철이라고 합니다. 제 발표 제목은 “돌봄의 정치”인데요,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돌봄이라고 하는 것을 사회적 변화의 관점에서 보자고 하는 제안입니다. 그 이유는 지금 돌봄 담론이 굉장히 많이 나오고 있잖아요. 특히 코로나 이후 많이 늘어나고 있는데, 그러한 돌봄의 이야기들 대부분은 사실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기보다는 현상 유지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돌봄을 중심에 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사회를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하고 있는가라는 걸 좀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돌봄을 중심에 둔다는 것

그 현상 유지의 대표적인 사업이 바로 이런 사업이 아닐까 하는데요. 잘 아시는 것처럼 지난 9월부터 서울시와 고용노동부가 협력해서 필리핀 가사관리사 시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공모 사업의 대상을 보면 직장 경력을 유지하며 육아 부담을 지고 있는 한국의 20-40대 맞벌이 부부라고 되어 있는데, 이 사업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특히 주목할 점은 이 돌봄 서비스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우리가 계속 일할 수 있도록 제공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이 돌봄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계속해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데 기여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 돌봄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자본의 기둥으로서 계속해서 유지되는 것이죠. 이러한 돌봄의 기능은 우리가 거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가사관리사를 노동자로 인정하고 그런 돌봄을 노동으로 인정하고 그 가치를 제대로 계산하고 제대로 지급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변화라고 하는 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집안에서 여성이 무상으로 하던 일을, 이제 그 여성이 아이를 낳아도 계속 일을 할 수 있도록 외국에서 온 다른 여성이 임금을 받고 그 일을 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사회적 변화라는 것은 뭐가 있을까요? 없는 거죠. 그러니까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런 돌봄 노동의 엄청난 가치 절하에 기대고 있는 시스템이고, 그러한 의미에서 현재의 시스템 하에서 돌봄에 대한 인정 같은 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돌봄이 중심이 되는 사회라고 할 때 그 사회의 의미는 이 돌봄의 서비스에 대한 수요를 잘 파악해서 잘 메꾸는 그런 사회는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즉 돌봄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어떤 필요를 채우는 문제로 생각해서는 아무런 변화도 있을 수 없다는 거죠. 따라서 돌봄에 대한 구성적인 관점, 즉 돌봄을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메커니즘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돌봄이라고 하는 기둥 위에 서 있다고 한다면, 현재는 그 기둥을 굉장히 가치절하하면서 서 있는 거죠. 그러한 기둥을 빼내어 다른 사회를 만드는 주춧돌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회에 대한 여러 가지 제안들이 있는데요,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가 그런 제안 중 하나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프레이저는 『전진하는 페미니즘』에서 돌봄 노동에서 기존에 젠더 정의를 실현하는 두 가지 모델을 언급하는데요, 하나는 보편적 생계부양자(universal breadwinner) 모델이고 다른 하나는 동등한 돌봄제공자(caregiver parity) 모델입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전자는 여성을 남성처럼 일하게 만드는 그런 모델이고, 후자는 여성의 차이를 그대로 인정하고 제대로 수당을 지급하는 그런 방식이죠. 프레이저는 두 가지 모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보편적 돌봄제공자 모델을 제시합니다. 이 모델은 거꾸로 남성을 여성처럼 만드는 것, 다시 말해서 모든 노동자를 돌봄 노동자로 가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모델이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 역시 여전히 돌봄을 필요를 채우는 문제로 한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돌봄이라고 하는 것이 사회에서 수행하는 기능 자체를 문제화하기보다는 그 기능 내에서의 정의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생산적인 노동”, 즉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하는 그런 노동이라고 하는 것이 현재의 이 문제적인 시스템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사람들이 계속 그렇게 일할 수 있도록 돌봄 혹은 재생산 노동이 그러한 노동을 계속해서 뒷받침하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노동에 대한 평등한 접근 — 모두가 일할 수 있도록 한다든지 혹은 모두가 돌봄을 하도록 한다든지 — 이전에 그 노동 자체를 문제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돌봄을 보편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돌봄의 기능을 문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돌봄을 말하기 전에, 돌봄이 지탱하는 이 노동 자체를 문제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치화로서의 돌봄

이 노동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가 대표적으로 『불쉿잡』이라는 책에서 쓸데없는 일자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요. 또 다른 글에서는 우리 사회가 일에 중독되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그레이버는 왜 일이 문제라고 하느냐. 물론 모든 일들이 다 필요 없다고 할 수는 없겠죠. 그렇지만 이러한 일들이 많은 경우에 사회적으로 아무런 의미 없는 일에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게 만들고, 그에 따라서 우리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결국 결정적으로는 이러한 노동들이 현 시스템을 굴리면서 우리의 삶의 터전 자체를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또 해리 클리버(Harry Cleaver)는 노동을 경제활동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통제 수단이라고 얘기하는데요, 이 노동이라고 하는 것이 자본에 대해 갖는 의미는 이윤을 창출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끝없이, 평생 죽을 때까지 일을 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우리를 계획 가능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른 모든 일에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에너지와 시간을 투여할 수 있는데, 그것을 다른 무엇도 아닌 노동으로 쏟아붓는 그런 인간으로 우리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노동이라고 하는 것은 경제적인 활동일 뿐 아니라 정치적인 도구이고, 그러한 도구를 지탱하는 것이 바로 돌봄이며, 따라서 그러한 역할을 문제화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지만 우리는 돌봄을 아예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노동력을 계속해서 재생산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쨌든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일이잖아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돌봄과 노동을 연결하는 고리를 끊는 것이죠. 다시 말해 돌봄을 하긴 하지만 다르게 하는 것, 그래서 다른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 이를 위해 돌봄을 자본의 가치화를 위한 과정이 아니라 자기가치화를 위한 과정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때 돌봄은 “어떤 삶을 원하는가”라는 물음을 찾아가는 과정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치화로서의 돌봄이 특히 오늘날의 인류세 시대에 더욱 중요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가치화라는 것은 결국 자기가 삶에서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고 그것을 얼마나 실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인 거잖아요. 오늘날 중요한 것은 어떤 정책, 제도, 기술 같은 것보다도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그레이버는 진정한 자유라고 얘기하는데, 그러니까 삶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자유라고 이야기합니다. 돌봄은 바로 그러한 자유를 구축하는 과정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근데 이때의 자유는 전적으로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자유는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인간으로 여기게 하는 것은 시장 체계가 야기하는 어떤 환상의 효과인 거잖아요. 그런데 사실 그 자유라고 하는 것을 돌봄과 함께, 그러니까 어떤 상대에 대한 책임과 의무와 함께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죠. 그래서 그레이버는 자유라고 하는 것을 어떤 종류의 의무를 누구에게 지고 살 것인가의 문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얘기하는 자유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치화할 수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에게 의무를 지는 것이고, 그러한 것들은 집합적인 과정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이런 의무는 굉장히 이중적입니다. 즉 앞에서 언급한 돌봄의 여러 가지 정의에서 그것이 어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면서 한편으로는 슬픔과 고난이기도 한 것처럼,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것은 늘 유대이면서 속박이기도 하잖아요. 그 경계는 굉장히 모호하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억압받는 느낌을 받게 될 수밖에 없고,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돌봄을 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늘 억압으로만 경험되는 거죠. 그러한 것들이 가장 여실히 드러나는 공간이 바로 가족이 아닐까 하고, 그래서 이 가족을 넘나드는 돌봄을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국가와 시장을 통한 돌봄도 앞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문제적이기 때문에, 돌봄에 대한 대안적인 접근, 공통적인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돌봄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자기가치화의 과정으로 이해할 때, 돌봄은 그 자체로 커먼즈의 구성 원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족을 공통화하고, 새로운 유대관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가족을 폐지하라』에서 소피 루이스(Sophie Lewis)는 이를 두고 근족(kith)이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이는 혈연 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새로운 관계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세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앞서 이야기했듯 어떤 종류의 사회에서 우리가 살고 싶은가의 문제라고 한다면, 근족의 구성이라고 하는 것이 그에 대한 답이 되는 어떤 실천이 아닌가 합니다.

돌봄 커먼즈의 물질적 조건으로서의 빚짐

따라서 지금 이야기하는 자기가치화하는 관계로서의 돌봄이라고 하는 것이 임금 노동을 거부하고 또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다른 관계를 만들어가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노동의 거부와 돌봄의 새로운 집합적인 재구성이라고 하는 것은 늘 한 몸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그런데 이런 것을 우리가 이야기할 때 늘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요, 앞서 디디 선생님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자본에게 판매할 노동력을 더 이상 생산하지 않고 노동을 거부하면 우리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느냐는 거죠. 바로 이러한 문제가 늘 우리를 얽매는 족쇄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노동을 거부하지 않는 이상 오늘날의 위기를 헤쳐나가기는 굉장히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조금 더 고민해야 하는 것은 돌봄을 중심에 두는 사회라기보다는 현재와 같은 노동을 거부하는 것을 중심에 두고, 그러한 것들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돌봄을 고민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씀드린 것처럼 그것은 쉽지가 않고, 결단과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다만 이 용기라고 하는 것은 어떤 개인적인 결심하고는 좀 구분되어야 할 것 같아요. 우리가 어떤 것을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은 사실 개인적인 과정이라기보다는 굉장히 집합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잖아요. 가령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할 때 ‘마음이 움직인다’ 같은 표현을 쓰는데요, 이러한 문장에서 우리는 마음이 자율성을 갖는 것이라고 은연중에 알고 있죠. 이 마음은 내 마음이지만, 사실은 내 것이 아닌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내 앞에 있는 어떤 다른 사람의 것도 아니고요. 그러니까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떠 있는 어떤 공통적인 것이고, 그 공통의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효과들이 나를 달리 움직이게 하는 거죠. 그러한 장(field)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고, 우리가 어떤 장에 접속했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만약 노동 거부를 위해 어떤 용기를 낸다고 했을 때, 그러한 주체적인 결단은 늘 집합적으로 일어나고, 그것은 우리가 어떤 장에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역사적 사례 속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앞에서 언급했던 해리 클리버는 68 혁명 당시에 대학생들이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운동을 할 수 있었는지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의 중요한 물질적인 토대가 바로 그 당시의 일자리 환경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내가 지금 이렇게 아무런 공부도 하지 않고 열심히 밖으로 나가 운동하고, 놀고 해도 “나중에 정 안 되면 뭐, 일하면 되지.” 이런 생각이 있었다고요. “뭐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기댈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때 우리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의 대학은 아주 다른 공간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그러한 선택을 하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장을 오늘날 어떻게 다시 만들 수 있을까요? 프레이저는 오늘날 돌봄 위기의 뿌리가 금융화에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이 문제를 간단하게 살펴 봅시다. 우리가 금융에서 가장 흔히 이야기하는 이 “빚”이라고 하는 것은, 늘 우리에게 억압적인 것으로 이해되지만 사실 우리는 일상에서 빚을 굉장히 넓은 의미로 쓰잖아요. 내가 누군가에게 빚지고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은 상황을 전제하는 것이고, 그 전제는 결국 그 빚이라는 것이 어떤 상호 의존을 암시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리처드 디인스트(Richard Dienst)는 “빚”(debt)과 “빚짐”(indebtedness)을 구별하면서, 빚은 좁은 의미에서 경제적인 채무로, 빚짐은 그보다 더 넓은 상호 의존의 감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빚짐을 기본적인 인간의 조건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빚은 정치적 요구로 재구성될 수 있는 충족되지 않은 사회적 필요를 표현한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가 어마어마한 빚을 져서 집을 사고, 병원을 가고, 학교를 다녔는데 그러한 빚들이 바로 충족되지 않은 사회적 필요가 왜곡되어 표현되는 방식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것들은 우리가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잖아요. 너무 비싸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은 우리가 공통으로, 사회적으로 서로에게 지고 있는 책임과 의무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이해할 때, 이 빚이라고 하는 것은 공통의 어떤 과제, 다시 말하면 공통의 재원, 공통재, 그리고 커먼즈가 되는 것이죠. 결국 우리가 지금 개인적으로 지고 있는 그 빚들을 어떻게 공통의 의무로 바꿀 수 있는가. 우리의 삶을 굉장히 힘들게 만들고 다른 선택을 하기 어렵게 만드는 그 장(금융)을, 어떻게 선택을 달리할 수 있는 장으로 만들 수 있는가는 그러한 것(빚)들을 우리가 얼마나 공통의 의무로 바꿀 수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어떤 종류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싶은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을 조금이나마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돌봄 이야기를 들으면서 늘 돌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요, 그러면서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도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듣잖아요. 어떻게 보면 그런 것들이 사회적으로 굉장한 아이러니를 낳는데,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절제하면서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걸신들린 짐승”, 곧 프레이저가 말한 카니발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를 계속해서 양육하고 있는 상태에 있어요. 이러한 상황을 우리가 벗어나기 위해서는 앞에서 이야기했던 노동의 거부를 중심에 두고, 그것을 어떻게 돌봄의 과정으로 실현해 갈 것인가의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레이버가 근래에 갑자기 죽기 얼마 전에 쓴 글에서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우리의 즐거움이 아니라 우리의 청교도주의다.” 이 말은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게 올바른 것이고,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고, 그러한 것들이 권할 만한 것이라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그러한 즐거움을 누릴 자격을 얻기 위해서 고통받아야 한다는 우리의 느낌이 문제”이고, “우리가 세계를 구하고 싶다면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글 | 권범철


발행인 | 박배균

편집장 | 이승원

편집 위원 | 김세환, 문지석, 송민석, 심여은, 윤수진, 윤형준, 한승지

발행처 | 서울대학교 아시아도시사회센터, 시ᆞ시ᆞ한 연구소

발행일 | 2025년 1월 31일

*2021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음(NRF-2021S1A5C2A03088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