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커먼즈 포럼 1 <돌봄으로의 전환에서 돌봄을 위한 전환으로>
세션 2 – 도시커먼즈와 돌봄: 공간, 먹거리, 자원순환
돌봄의 공간들을 재조립하기
이준용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박사과정)
경계와 재조립: 돌봄을 연구하는 저의 관점
우선은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리겠습니다. 제가 학회 스타일로 너무 건조하게 준비를 했는데 이렇게 생생한 활동가분들께서 이렇게 계실 줄 알았다면… 저도 제 원래 주력 콘텐츠는 불교적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걸 가져왔을 텐데, 일단은 학회 스타일로 올해는 이렇게 해보고, 만약에 다음에 또 기회를 주신다면 불교 공동체 주제를 가져오겠습니다.
저는 ‘돌봄의 공간들을 재조립하기’라는 제목 아래 제가 돌봄을 연구했던 두 공간을 간략하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목차는 이와 같습니다. 먼저 연구의 관점을 소개해 드리고요. 돌봄으로의 전환에 해당하는 공간이 한살림 제주—여기 계시는 존경하는 김자영 선생님이 주로 활동하고 계시는—의 지역 돌봄 사례를 소개해 드리고요. 이어서 돌봄의 전환에 해당하는 공간인 특수학교의 돌봄 사례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돌봄을 연구하기 위한 관점으로 저는 ‘경계’와 ‘재조립’ 두 개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생협이라는 경계 내부에는 조합원들이 속해 있고, 내부 구성원의 권리를 보호하고 지키려는 노력은 경계선을 강화하게 됩니다. 그런데 강화된 경계는 때때로 외부와의 소통을 막는 역효과를 낳습니다. 이걸 저는 ‘담’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고요. 이렇게 구분된 경계의 안팎에서 작은 연결과 상호작용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저는 ‘재조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인류학자가 그런 실천을 포착하고 추적하는 방법도 라투르에 따르면 ‘재조립’이라 부를 수 있고요.
사실 라투르를 자꾸 가져온다고 지도교수님께 혼도 나는데, 불교 설명할 때 되게 좋더라고요. 이 재조립이라는 게 사실은 위빠사나(vipassana)와도 되게 비슷해서 가져온 개념입니다. 나중에 또 설명드릴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살림 제주의 사례: 담을 넘는 지역 돌봄
먼저 지역 돌봄으로의 전환인 한살림 제주의 사례를 소개드리겠습니다. 오른쪽 사진을 보시면 이 건물 외벽에 ‘제주 담을’이라는 고유 명칭이 한살림이라는 공통 명칭보다 더 크게 달려 있습니다. 이 명칭에 대해 해석이 갈리는데요. 한살림연합 측에서는 ‘제주도민들을 생협 안으로 담겠다’는 의미로, 한살림 제주 측에서는 ‘담을 넘겠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살림 물류는 보통 전국 생산지로부터 취합해서 각 지역으로 나눠 보내는 구조인데요. 이 흐름은 물류센터가 생길수록 더 강화돼서, 수도권 근처의 생협이 유리해집니다. 반면 주변부 생협은 거리가 멀어 불리할 수밖에 없고요. 저는 이 구조 자체가 중앙과 주변부 사이의 일종의 ‘담’을 형성한다고 봅니다. 또 생협 관련 법은 조합원 중심의 물품 공급을 규정하고 있어서, 지역과 연결을 강화하려면 조합원화가 필수인데, 그 비용은 지역 생협이 떠안고 있습니다. 거기다 제주에는 ‘괜당’이라고 불리는 지역주의의 담도 있어서, 넘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한살림 제주는 2019년에 자체 제조·물류센터를 세우고, 그걸 담당할 조직 ‘밥상살림’을 만들고 사회적기업 인증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시도는 큰 비용과 리스크를 수반했고, 연합 측에서는 “이건 원칙에 어긋난다”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죠. 게다가 한살림의 높은 유기농 기준 자체가 또 다른 문턱이 되는데요. 이 기준을 맞추기 위해선 너무 많은 비용이 필요하고, 청년농·고령농·귀농 농민들에겐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밥상살림에서는 유기농 기준을 단계적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자주기준’을 마련했고, 기존 농법을 점진적으로 포기하고 적응할 시간을 주었습니다. 무경쟁 시장도 제공하면서요. 그런데도 실제로 이 문턱을 넘어 성공한 제품은 마른두부 하나뿐이었어요. 이처럼 생협 경계 외부의 농민을 내부로 들여오는 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살림 제주는 내부지향적인 담을 넘기 위해 다양한 외부 활동을 시도하고, 돌봄의 경계 설정을 해왔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운동가로서 공동 정체성을 가지고 시위에 참여하거나, 생활공동체로 다양한 모임을 조직하고, 자원봉사 비영리법인을 설립해서 공공사업화를 시도했고요. 의료생협도 만들고 있습니다. 이걸 라투르 식으로 표현하면 ‘감싸기’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제주도민의 10%를 조합원으로 만들고 싶다는 목표 아래 새로운 사회 경계를 설정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한살림 제주의 경계 설정은 누군가를 내부로 ‘끌어들이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면서 유연하고 임시적인 연계를 만들어나가는 방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싸야 할 내부도, 적대해야 할 외부도 따로 없고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 유연함이 줄어들 수도 있고, 새로운 경계가 필요해질 수도 있죠. 이럴 때는 장치를 도입해서 명료하게 할 수도 있지만, 새로운 방식의 경계 설정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살림 제주의 지역 돌봄은 이렇게 정의될 수 있습니다. 내부 보호를 위한 집단이기주의도, 이상주의도 지양하면서 내부와 외부 사이를 연결하고, 시기적절한 새 경계 설정을 통해 살림의 원동력을 되살리는 것. 저는 이 경계와 경계선의 일치 상태를 돌봄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이게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와도 맞닿아 있고요.
특수학교의 실천: 돌봄 관점의 확장
다른 연구인데요. 이건 특수학교에서 돌봄 관점을 확장해본 사례입니다. 아직은 ‘돌봄의 전환’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돌봄을 보는 관점을 바꾸게 해 준 현장이었어요. 돌봄 논의는 원래 사회복지 분과 주제였고, 주로 국가 정책 같은 3인칭 시점에서 다뤄졌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의료인류학 분과 등에서 당사자의 1인칭 시점을 다루면서 논의가 풍부해졌고요. 제가 보기엔 지금 필요한 작업은 두 가지입니다. 1인칭과 3인칭이 연결되는 지점을 만드는 것, 그리고 여전히 인간 중심인 기존 관점을 넘어서 새로운 경계를 설정하는 일입니다.
이 연구는 20년 이상 특수학교에서 근무한 교장 선생님 4명과 10년 이상 교사 1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이고요. 장애 아동의 역량 형성과 돌봄 방식을 분석했습니다. 핵심은 ‘자기 돌봄 역량’이었어요. 신변 처리라든가, 사회에서 살아남는 데 필요한 생존 역량들. 그래서 삼각형 모형을 만들었는데요. 2인칭과 3인칭 규범이 주입되고, 1인칭 주체가 적응적 선택을 하고, 다시 비인칭적 연결을 통해 외부 환경을 재구축하는 순환고리를 형성하는 구조입니다. 이 안에서 기존의 분리된 돌봄 관점들이 서로 ‘커머닝’됩니다. 즉, 돌봄 관점들이 연결되면서 전환이 일어나고, 자기라는 경계가 재조립될 때, 돌봄도 가능해진다는 거죠.
마지막으로 정리해보면, 생협 공동체의 경계 재조립이든, 자기라는 경계의 재조립이든, 돌봄의 전환은 ‘경계 연결’에서 시작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왼쪽 그림처럼 기존 담론은 경계를 확장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선별 기준이 남아 있어서 외부자들은 구제되지 못합니다. 내부에 있는 우리조차도 기준에 맞춰 살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오른쪽처럼 경계와 경계를 연결하면, 그 사이에 임시적인 대안 공간이 생길 수 있어요. 실체는 없지만, 함께 대안 행동을 모색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죠. 오늘 이 커먼즈 포럼이야말로 그런 임시 대안 공간의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계신 선배님들과 함께 이 대안 공간을 계속 연구해나갈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발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 | 이준용
발행인 | 박배균
편집장 | 이승원
편집 위원 | 문지석, 송민석, 심여은, 윤수진, 한승지
발행처 | 서울대학교 아시아도시사회센터, 시ᆞ시ᆞ한 연구소
발행일 | 2025년 5월 31일
*2021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음(NRF-2021S1A5C2A03088606)